[차현진의 돈과 세상] [54] 그때는 맞았지만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2022. 1.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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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하는 데 만족했다. 이른바 먼로주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대륙 밖의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렀다. 그것은 세계 최강국이 겪는 왕관의 무게였다. 닉슨 대통령은 그 무게를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소련까지 개입하려고 하자 북극 근처에서 공군기로 군사 시위를 벌였다. 소련을 향해 ‘두 전쟁’도 가능하다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럴 능력은 없었다. 소련을 향한 힘자랑은 슬그머니 중단되었다.

러시아가 미국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다. 흑해 주변을 비행 중이던 미국 정찰기에 러시아가 최근 총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미국이 개입하면, 미국과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대만 문제를 두고 중국과도 한판 붙을 가능성이 있는 미국이 절대로 ‘두 전쟁 전략’을 감당할 수는 없다는 계산 끝에 나온 행동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오래된 지금 ‘두 전쟁 전략’은 구호일 뿐이다. 백악관이 국방 예산을 늘려달라고 할 때 동원하는 의례적 수사에 불과하다. 말은 있지만 존재하지 않으니 도깨비라고 할 수 있다.

‘재정 준칙’도 비슷하다. 말은 있지만 존재한다고 하기가 어렵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1992년 재정 적자를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3%, 국가 채무를 60% 이하로 유지하는 준칙에 합의했다(마스트리히트 조약). 하지만 27회원국 중 15국이 지금 그 준칙을 못 지키고 있다. 언제 지키게 될지도 오리무중이다. 미국은 국가 채무 한도를 잘 지킨다. 그러나 툭하면 그 한도를 늘려서 결국 유럽과 오십보백보다.

말은 있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이상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금 힘들면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린다”면서 원칙을 쉽게 팽개친다.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도 그렇다. 연초에 계획했던 금연과 다이어트를 이맘때쯤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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