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의 특급논설] 정용진 부회장님, 정치를 돌 보듯 하세요
SNS 인플루언서의 함정
괜히 정치에 끼어든 통에
주가 흔들리고 불매 조짐
신세계는 재계 11위 재벌
오너는 막중한 책임 가져야
"사업가로 살다 죽을 것"
예전의 센스 되찾아달라
[파이낸셜뉴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54)은 인스타그램 스타다. 팔로워가 75만명에 이른다. 인기 연예연 못지 않다. 정 부회장은 인심 좋은 키다리 아저씨로 명성이 높다. 지난 2020년 정 부회장은 감자, 고구마, 바다장어 '완판남'으로 등극했다. 요리 스페셜리스트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TV 프로그램에서 SOS를 치자 정 부회장이 이를 흔쾌히 수용한 결과다. 신세계그룹은 아래 백화점과 이마트가 있다. 총수가 특정 제품을 신세계 유통망에 태우면 품절은 시간문제다. 농·어촌은 코로나 사태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 부회장의 소탈한 성품과 선한 영향력은 대중의 박수를 받았다.
정 부회장은 세금 문제도 깨끗하다. 여느 재벌 총수와 다르다. 지난 2006년 아버지가 정 부회장과 여동생에게 지분 전량을 넘겼다. 남매는 합쳐서 증여세 3500억원을 에누리없이 다 냈다. 당시로선 역대급 증여세로 화제를 모았다. 2020년엔 어머니가 보유주식 일부를 남매에게 넘겼다. 이때도 남매는 투명한 납세 절차를 밟았다.
◇너무 나간 정용진
그런데 정 부회장이 오버했다. 스스로 '멸공' 풀섶을 지고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정치는 손익을 중시하는 기업인이 기웃댈 곳이 아니다. 멸공을 외치는 건 개인의 자유다. 정 부회장이 태어난 해(1968년) 이승복 어린이는 북한 무장공비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승복 어린이의 투철한 반공 정신을 되새긴다.
하지만 정 부회장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싫든 좋든 그는 공인이다. 2021년 기준 재계순위 11위의 신세계 그룹을 총괄한다. 계열사만 45개다. 그런 그가 SNS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이 든 기사를 올리고 그 아래 멸공, 방공방첩, 승공통일 해시태그를 단 건 지나쳤다.
그룹에선 정 부회장을 말릴 사람이 없다. 누가 감히 오너한테 쓴소리를 하겠는가. 이래서 오너 리스크가 되풀이된다. 행여 정 부회장이 "아무도 나한테 인스타그램 접으라고 하지 않던데"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오다.
지난 7일 조국 전 법무장관은 트위터에 "21세기 대한민국에 숙취해소제 사진과 함께 '#멸공'이란 글을 올리는 재벌 회장이 있다. 거의 윤석열 수준"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때 정 부회장이 '묵언수행'에 들어갔다면 본인은 물론 회사를 위해서도 좋았을 것이다. 조 전 장관을 두둔해서가 아니다. 사실 조 전 장관이 '21세기' 운운한 데는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21세기에 '죽창가'를 운운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정 부회장이 그쯤에서 한 발 물러서길 바랐다. 그래야 키다리 아저씨 이미지도 살고 회사 주가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봤다.
웬걸, 정 부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조 전 장관의 글을 제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리스팩'이란 해시태그를 달았다. 리스팩(Respect)은 존경한다는 뜻이지만 누가 봐도 조 전 장관을 비꼬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마당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까지 가세하면서 정용진발 멸공은 온전히 정치 이슈가 됐다. 윤 후보는 8일 인스타그램에 '이마트, 달걀, 파, 멸치, 콩, 윤석열'이란 해시태그를 달았다. 이으면 달파멸콩이다. 달(Moon)은 문재인 대통령, 달파는 문파(빠), 멸콩은 멸공이다. 윤 후보가 문 정부의 친중 정책을 꼬집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급기야 사태는 "일론 머스크 말글 한마디로 코인 시장이 들썩이고 트럼프 트윗 한 줄로 국제금융시장이 출렁이는 모습 보면서 부러웠을까"(김태년 의원), "국힘 대선 후보와 정치인들의 '달-파-멸-콩' 일베 놀이"(조국 전 장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과속하는 것 같다"(김의겸 의원), "멸공할 거면 군대 가셨어야 한다"(방송인 김어준)는 데까지 번졌다.
◇미국의 경우, 중국의 경우
물론 기업인이라고 다 입을 닫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앙숙이다. 워런 의원은 억만장자세를 추진 중이다.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같은 울트라슈퍼 리치가 대상이다. 머스크는 트위터에 '캐런 상원의원'이란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았다. "어렸을 때 아무 이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던 내 친구의 화난 엄마가 생각난다"면서다. 미국에서는 이런 백인 여성을 '캐런'으로 부른다.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머스크와 앙앙불락하는 사이다. 샌더스는 작년 11월 트위터에 "극도로 부유한 자들이 공정한 몫(세금)을 내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썼다. 그러자 머스크는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계속 잊고 있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샌더스 의원은 1941년생으로 올해 여든한 살이다.
그래도 머스크가 멀쩡한 걸 보면 미국의 언론자유는 정말 알아줄 만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미국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나라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중국을 보라. 알리바바는 중국을 대표하는 혁신기업이다. 그런데 창업자 마윈은 몇년 째 반 실종 상태다. 2020년 10월 상하이에서 열린 금융 포럼에서 마윈은 "당국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감독정책을 취하며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뼈아픈 소리를 했다. 단박에 마윈은 괘씸죄에 걸렸다. 그 벌로 당국은 거대 자회사 앤트그룹(알리페이)의 기업공개(IPO)를 무산시켰다.
한국은 중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도 아니다. 괘씸죄란 단어가 여전히 신문에 나오는 걸 보면 미국보다 중국에 가깝지 않을까. 현대(차)그룹을 창업한 정주영은 1992년 대선에 출마했다. 김영삼, 김대중과 3파전을 치렀으나 3위로 낙선했다. 그 뒤 김영삼정부가 현대를 세무조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993년 의원직을 사퇴한 정주영은 김영삼정부 내내 조용히 지냈다. 정주영 사례에서 보듯 한국 정권은 반기를 든 기업을 잊지 않는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1995년 베이징 특파원들과 간담회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여야 의원들이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전 회장은 정치 발언을 삼간 채 위기론, 샌드위치론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데 그쳤다.
◇신중한 처신을 당부한다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은 정용진 부회장의 외할아버지다. 이병철은 '불가근 불가원'을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정치와 너무 가까워도 또 멀어서도 안 된다는 경구다. 방점은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데 찍혔다. 정부와 싸우지 말라는 증시 격언도 되새겨봄직하다.
'멸공' 발언 파장으로 주가가 떨어지고 이마트·스타벅스에 대한 불매운동 기미마저 보인다. 다행히 신세계 주가는 11일 급락세를 멈추고 반등했다. 정 부회장이 정치와 거리두기에 나선 덕이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정 부회장은 10일 인스타그램에서 "사업하는 집에 태어나 사업가로 살다 죽을 것이다. 진로 고민 없으니까 정치 운운 마시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내 일상의 언어가 정치로 이용될 수 있는 것까지 계산하는 감, 내 갓끈을 어디서 매야 하는지 눈치 빠르게 알아야 하는 센스가 사업가의 자질이라면…함양할 것"이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정 부회장은 기업인이다. 대중을 향한 선한 영향력도 월등하다. 부디 예전의 키다리 아저씨, 완판남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그의 센스를 믿는다.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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