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은 아니어도 경계심은 가져야

김경락 2022. 1. 11. 18: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프리즘]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6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5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회의를 주재하면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 경제팀장

불과 3~4년 전만 해도 넉넉히 재정을 쓰는 데 환영하는 목소리는 작았다. 지금과는 풍경이 크게 달랐다. 진보 성향 시민단체는 ‘혈세’란 표현을 동원해 낭비성 예산 사업 찾기에 열중했다. 현 정부를 지탱하는 정치 세력도 다르지 않았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 세력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던 터라, 재정 운용에 대해서만큼은 좌우가 대동단결했다. 재정당국도 국제통화기금(IMF)·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의 거듭된 적극 재정 권고를 ‘한국을 털어먹으려는 외국 자본의 음모’쯤으로 치부하며 재정 건전성 사수에 온 힘을 쏟았다.

외국 학자들이 종종 쓰던 ‘부채 강박증’이란 표현을 빌려와 당시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다룬 바 있다. 당시 우리 사회에 팽배한 ‘재정 보수주의’ 수준이 정신병리학적인 측면이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과도하다고 봐서다. 깊어가는 소득 불평등과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 등의 영향으로 줄어든 소비 여력 탓에 저성장·저물가 현상이 굳어지고 장기화하는 가운데에서도, 또 다른 나라에 견줘 수입과 지출 모든 면에서 작은 재정 규모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소극적 재정 운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흘러간 얘기를 되짚는 까닭은 오늘날엔 과거와는 다른 방향에서 우려를 갖게 하는 현상이 속출해서다. 우선 여의도 정치다. 최근 두어달간 추가경정예산 편성 목소리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나왔는데, 그 흐름이 의아했다. 한쪽이 50조원을 주장하니 맞받아 100조원을 거론하는 등 한 영화의 대사처럼 ‘묻고 더블 식’ 핑퐁이 나타났다. 최저임금은 많이 올릴수록 저임금 계층에 더 이롭거나 더 진보적인 입장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팽배했던 현 정권 출범 전후의 논법이 재정이란 말을 갈아타고 다시 등장했나 싶었다. 정치권이 재정을 게임 판돈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겠으나, 재정이 숙고 없는 정치 공학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지우기 어렵다.

두번째는 엉성한 재정당국이다. 그들의 보수적 경향과 별개로 예측 영역만큼은 전문 관료로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줘야 한다. 두차례나 세수 전망을 50조원 남짓 큰 폭 수정하고서도 또다시 10조원 내외의 적지 않은 초과 세수가, 그것도 4분기(10~12월)에 발생한 건 실력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시장에선 관료들이 엑셀 작업 실수를 한 것 아니냐는 식의 조롱이, 정치권에선 돈을 쓰지 않으려는 당국의 음험한 의도가 깔린 것 아니냐는 의심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실수와 의도를 떠나 엉성한 예측과 잦은 오류는 증거에 토대를 둔 정책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며, 재정을 포함한 경제 운용에 왜곡과 그에 따른 비용을 낳는다. 얼마 전 홍남기 부총리가 언급한 ‘기재부다움’은 엄격한 숫자 관리와 냉정한 예측에서 시작돼야 한다.

가장 큰 불길함은 경제를 둘러싼 폭넓은 환경 변화다. 한동안 보지 못한 수준의 물가 상승률에다 이를 잡기 위한 미국의 긴축 행보가 발 빠르다. 이에 시중금리도 전방위로 뛰고 있다. 예단할 수는 없지만 거의 10년간 지속해온 저성장-저물가-저금리 현상이 점차 저물고 있다는 의견도 점차 확산하고 있다. 실제 경제의 큰 물줄기가 변화하고 있으며 현재가 그 변곡점이라면 재정에 대한 시각도 조정해야 한다. 재정 여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른다면 같은 규모의 부채를 갖고 있더라도 갚아야 하는 이자는 불어나기에 그렇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 석학들이 확장 재정을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안심하라며 제시한 핵심 논거 중 하나가 경제성장률보다 낮은 금리 환경이었다. 이런 환경이 바뀐다면 부채에 대한 강박으로까지 회귀할 필요는 없더라도 경계심을 갖고 최소 3~5년의 시계 속에서 세수 확충을 포함해 재정 확장의 강도를 조절하는 등 재정 전략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 자칫 ‘확장 재정 강박증’에 빠져 변하는 환경을 흘려버린다면, ‘그때도 틀렸고 이번에도 틀렸다’란 훗날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sp96@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