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피해' 질문 뻔한데.."미성년 성폭력 법정신문서 양형 반영해야"

임재우 2022. 1. 1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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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영상진술 증거' 위헌결정 이후
판검사·활동가들 10일 밤 긴급토론
"2차피해 불가피..섣부른 결정" 동의
'판사 소송지휘권'도 대안..인식 중요
게티이미지뱅크

헌법재판소가 미성년 성폭력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결정하면서 법원 내부에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법원 내 연구회인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회장 오경미 대법관)는 10일 밤 긴급 토론회를 열어 법정에서 날 선 반대신문을 마주하게 될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판사·검사·변호사·활동가들은 지금의 재판 방식으로는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가 불가피하다며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검사도 “헌재가 지나치게 낙관적 판단”

헌재는 지난달 23일 미성년 성폭력피해자의 진술 영상을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성폭력처벌법 제30조 제6항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해당 조항은 미성년 피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진술하면서 생길 수 있는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헌재는 이 조항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봤다. 이제 피고인의 요구가 있으면 미성년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출석해 피고인 쪽의 반대신문에 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토론회에서는 이번 결정이 법정에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이뤄졌다는 지적이 많았다. 조현주 대한법률구조공단 울산지부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는 “반대신문 중 피해 사실과 무관하거나 피해자에게 모욕적인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고, 연소한 피해자에게 피고인의 변호인이 피해자를 위협하거나 다그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며 “법정 증언 뒤 2차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도 다수”라고 했다. 피해자 진술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피고인 반대신문의 특성상 2차 가해성 질문이 나오는 상황이 빈번한데도 재판부가 이를 적절히 제지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헌재는 위헌 결정을 하되 △수사 초기 적극적인 증거보전 △중계장치를 통한 증언 △피해자 변호사제도 등을 통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면서도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재판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오정희 서울고검 검사는 “피해 정도가 중하고 쟁점이 복잡한 사건일수록 피해자 증인신문을 위한 증거보전 절차를 ‘수사 초기 단계’에 진행하기는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수사가 일단락된 후에 추가로 진행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이로 인해 피해자 증언 횟수는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헌재) 결정의 낙관적인 전망에 동의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현직 판사들 “법정에 부르는 일 자체가 2차 피해 본질 가져”

현직 판사들의 우려도 적지 않았다. 김동현 판사(사법정책연구원)는 “성범죄 피해자를 법정에 나오게 하는 일 자체가 2차 피해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특히 김 판사는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 증언을 통해 ‘2차 피해’라는 부담을 안게 된 만큼, 반대신문이 피고인의 불필요한 방어권 남용으로 드러날 경우 이를 양형에 반영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심리 후에 불필요한 증인신문이었고 피고인의 방어권 남용이었음이 밝혀진다면 미성년 피해자에게 불필요한 추가적 피해를 입힌 결과가 된다. 따라서 이 경우 피고인이 양형에서 불리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증인신문 전 당사자들 사이에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기쁨 판사(사법정책연구원)는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은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 보호를 위해 다소 제한될 수 있다”며 재판장이 2차 피해를 주는 질문을 제한하거나 수정하는 등 소송지휘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필요성을 짚었다.

피해자 조력자 사이에선 판사들이 이미 도입된 피해자 지원제도에 대한 이해조차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옥선 진술조력인은 “법원에 가면 판사들이 진술조력인은 무엇을 하는지 자주 묻는다”고 했다. ‘진술조력인 제도’는 성폭력 범죄 또는 아동학대 범죄 피해를 입은 아동·장애인이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거나 법정에서 증언할 때 진술조력인의 도움을 받도록 하고 있다. 장옥선 진술조력인은 “제도상으로 공판 기일 전에 진술조력인이 판사·검사·변호사 등과 함께 증인신문방식을 협의·논의할 수 있게 되어 있다”며 “하지만 실제로 협의했던 경험은 거의 없고, 주변 조력인들에게서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러 기관 다니게 할 게 아니라 ‘하나의 문’ 열도록”

이번 헌재 결정을 계기로 미성년 피해자가 수사기관·법원 등 여러 기관을 돌아다니며 낯선 사람들 앞에서 피해 경험을 되풀이해 말하는 방식으로 짜인 제도를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쳐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오선희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는 북유럽 바르나후스 모델(Barnahus, 아동의 집)의 ‘하나의 문 원칙’을 예로 들면서 “전문가들이 모여서 아동에게 다가가야 하지, 거꾸로 아동이 전문가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방향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오 변호사는 “(북유럽 모델에서는) 검사·경찰·사회복지사 등 전문가가 자문회의를 해 조사방법을 결정하고, 전문가들이 참관한 가운데 전문조사관이 피해 아동의 진술을 들으며 이를 영상 녹화한다”며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만큼이나 아동 보호도 중요한 공익이므로 이런 노르딕 모델의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화상회의 방식으로 300여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토론회가 밤 10시30분께 마무리된 뒤 연구회 회장인 오경미 대법관은 “우리가 처한 딜레마 속에 법원뿐 아니라 관련 전문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것을 시작으로 현재 제도 하나하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제도를 어떻게 새로 디자인하고 마련할 것인지 여러 분야의 노력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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