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에이도스를 찾아서' 한국추상화가 7인전 2월 6일까지 전시 단색화 형성기 활약 잊혀진 작고화가들 미술사적 위상 재조명
차가운 추상마저 온기가 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주목받았던 류경채(1920-1995, 황해도 해주)의 작품 '향교마을 75-5'나 '날 85-6'은 40년 전 작업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작이다. 그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구상화에서도 탁월했지만, 계절이나 날씨 등의 정감을 표현한 서정적 추상으로 한국 추상회화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의 작품은 서구에서 건너온 기하학적 초상과 닮아보이지만 붓질이나 나이프 자국 등으로 화면에 개성있는 운율을 새겨넣어 차별화했다. 한국 추상화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단색화에 대한 힌트가 보이는 듯도 싶다.
이상욱(1923-1988,함흥)의 1984년 작품 '봄-B’은 물감을 묽게 희석한 후 일필휘지로 붓을 휘갈겨서 서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를 우리 식으로 내재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추상회화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대형 기획전 '에이도스(eidos)를 찾아서: 한국 추상화가 7인'이 학고재 전관에서 펼쳐졌다. 김복기 경기대 교수가 총괄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잊힌 작가들의 미술사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의 첫발을 뗀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이다.
전시제목의 '에이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존재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상(事象)의 본질을 좇는 추상회화의 속성을 의미한다.
한국적 추상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남관(1911-1990)을 제외하고 이들 뒤를 이어 추상회화 족적을 남긴 1920~30년대생 작가들 위주다. 이봉상(1916-1970, 서울)과 류경채, 강용운(1921-2006, 전남 화순), 이상욱, 천병근(1928-1987, 경북 군위), 하인두(1930-1989, 경남 창녕), 이남규(1931-1993, 대전) 등 7인의 작품 총 57점을 모았다. 별관 전시장 한편에 작가들 교류 활동 기록을 모은 아카이브 섹션도 선보였다. 대부분 후학을 양성하고 훈장을 받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고후 상당기간 전시가 없었던 역사는 반성할 만하다.
김복기 교수는 "한국 추상회화는 서구 미술의 추상계보로 온전히 설명이 안된다"면서 "현대미술의 큰 흐름인 추상회화라는 보편적 형식에 한국정신을 담아 주체적으로 자기화하려는 과정이야 말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박미란 학고재 디렉터는 "단색화로 촉발된 한국미술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단색화 전후 좌우로 미술사 연구를 펼쳐 더욱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기획전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봉상은 홍익대 교수를 그만두고 쉰이 넘어 뒤늦게 추상을 본격화한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나 아쉬운 인물이다. 1968년작 '미분화시대 이후2'는 식물 열매 단면이나 세포를 연상시킨다. 형태를 환원시키니 원시적이고 아득한 태고의 풍경이 됐다.
천병근은 일본에서 배운 초현실주의를 추상에 접목했다. 국내 화가들의 첫 해외 전시였던 1958년 '한국현대회화전(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 이중섭 등과 함께 발탁돼 참여했다. 그는 후반기에 구상화로 돌아가며 존재가 묻혔다.
강용운은 전남 광주에 남아 호남 추상미술을 개척한 존재다. 전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1943년작 '눈이 있는 정물'을 선보였다. 1960년대 장판지에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고, 불을 지피는 등 다양한 재료 실험을 펼친 작품을 선보였다면 1970년대는 전통 수묵화처럼 묽은 물감으로 담백하게 자연의 정감을 녹였다.
이밖에 오방색을 활용해 불교적 세계관을 구현한 하인두와 가톨릭 신자로서 생명의 빛을 표현한 이남규도 인상깊다.
잊혀진 작가들의 DNA(유전자 본체)가 후대로 이어진 것도 흥미롭다. 하인두는 부인 동양화가 류민자의 사이에서 요즘 인기 절정인 '칼라 밴드'작가 하태임과 'White’연작으로 유명한 하태범 작가를 낳았다. 류경채는 조각가 류인과 류훈의 부친이다. 강용운의 아들 강일진은 부친 뒤를 이어 호남 서양화단을 이끌고 있다. 한진수와 함께 부부화가였던 천병근의 딸이 화가 천동옥이다. 부친 후광을 벗어나려던 후손들 때문에 존재가 잊힌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