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전환기 大選..'시대정신' 다시 화두가 되다

오남석 기자 2022. 1. 1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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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카인즈’ 종합일간지 데이터베이스(1990년 1월 1일자∼ 2022년 1월 10일)에서 찾아낸 키워드 ‘시대정신’의 연관 검색어들. 글자가 클수록 자주 언급된 단어다.

■ 계간지·단행본 출간 잇따라

시대를 지배·특징 짓는 정신

韓선 2007년부터 선거와 연관

정치권·지식층 중심으로 사용

2022년 시대정신의 요체는

복합적 문제 해결 능력 꼽아

이성적 사고·과학 정신 강조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3·9 대통령선거를 50여 일 앞두고 ‘시대정신(時代精神)’을 둘러싼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주요 대선 후보와 정당이 너도나도 2022년 한국 사회 시대정신의 담지자를 자처하는 가운데, 시대정신을 화두로 내건 계간지와 단행본 서적의 출간이 잇따르고 있다.

이번 대선은 그야말로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거대한 전환기에 치러진다. 안으로는 극심한 양극화와 갈등 속에 모든 권위가 붕괴됐다. 밖으로는 전 세계적인 기후 위기와 감염병 유행, 미국·중국 충돌 위험, 인공지능(AI)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 충격이 강타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시대정신 논쟁을 정치권과 일부 학자의 ‘리그’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대정신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주권자인 국민이 선택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얘기다.

◇‘시대정신’ 다룬 출판물들 = 계간지 ‘철학과 현실’은 2021년 겨울호 대부분을 시대정신이라는 화두로 채웠다.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등 4명의 원로 학자가 ‘시대정신과 리더십’을 주제로 특별좌담을 했다. 김경동·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의 칼럼도 모두 시대정신을 다뤘다. 진보 목소리를 대변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도 2021년 겨울호에서 ‘불평등,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대응할까’를 주제로 한 전문가 대화를 실었다. 김소라 제주대 사회학과 강사와 이남주 ‘창작과 비평’ 편집주간,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용접공 칼럼니스트 천현우 등 4명이 참여한 이번 대화는 이 잡지가 ‘2022 대선, 대전환의 과제’라는 타이틀을 걸고 2021년 여름호부터 이어온 시리즈의 세 번째 순서다. 앞서서는 ‘지방 소멸, 대안을 찾아서’ ‘촛불혁명의 현재와 촛불정부 2기의 과제’를 주제로 한 대화가 연재됐다. 이 밖에 원승연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 등이 경제 분야 개혁과제를 짚은 ‘정책의 시간’ 등 시대정신에 초점을 맞춘 단행본 출간도 이어지고 있다.

◇‘시대정신’, 2007년 대선 계기로 한국서도 대중화 = ‘시대정신’은 18세기 말 독일에서 등장한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는 개념을 번역한 말이다. 중원문화사의 ‘철학사전’에는 “각각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정신적 경향, 요컨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 상태”라고 그 뜻이 풀이돼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용어를 유독 선거와 연결지어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 ‘시대정신’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분석해 보면, 17대 대선이 치러진 2007년부터 이 용어가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빅카인즈 데이터베이스에 포함된 1990년 1월 1일자부터 2022년 1월 10일자(오전 현재)까지 11개 종합일간지에 실린 시대정신 관련 기사는 총 1만8012건이다. 1990년 72건을 시작으로 매년 100∼200건 수준이던 기사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6년 509건, 2007년 1017건으로 급증했다. 이후에는 연간 600건 안팎 수준이다가 18대 대선이 있던 2012년(1522건), 19대 대선이 치러진 2017년(1181건) 등 5년마다 큰 폭으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20대 대선을 앞둔 2020년(1097건)과 2021년(1787건)에도 큰 폭의 증가를 보였다.

2007년 무렵부터 한국 정치권 및 지식인 사회에서 시대정신이라는 용어가 기존 의미와는 조금 다른 용도로 유행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을 한국의 시대정신을 ‘선진화’로 제시하며 이명박 정부 탄생을 도왔다. 이들 중 일부는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진보 진영에서도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와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등을 중심으로 시대정신이라는 틀로 정치적 격변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10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시대정신이라는 용어가 선거 때마다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현상에 대해 “가치와 정신을 중시하는 한국의 특수한 문화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시대적 과제’가 구체적인 정책을 가리킨다면 ‘시대정신’은 꼭 필요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치에 좀 더 비중을 둔 개념”이라며 “한국에선 그냥 선거 슬로건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이 시대정신을 실현할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게 더 어필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시대정신 논쟁을 두고 추상적이라는 비판도 나오지만, 안 교수는 “시대정신 담론이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는 “시대정신을 파악하려면 행태주의적인 통계 분석을 넘어 철학·사회학·심리학 등 다양한 차원에서 심층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며 “이는 유권자의 변화를 표피에서보다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보게 하는 좋은 분석 관점”이라고 했다.

◇대전환기 2022년의 ‘시대정신’은? = 시대정신 개념을 발전시킨 G W F 헤겔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끝나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말한 바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결정론이라고 비판한 칼 포퍼는 시대정신이 알 수 없는 무엇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이에 ‘철학과 현실’ 편집인인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말한다. “현시점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을 구현할 적임자가 누구인지 선뜻 선택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는 있다. 안 교수는 ‘거대한 전환기의 복합적 문제 해결’을 2022년 한국의 시대정신으로 꼽았다. 그는 “지금과 같은 이행기에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대안이 분명치 않아 불안하지만 5년 전 대선 때와 달리 기후 위기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극단적 불평등 등 위기 상황이 제대로 감지되고 있다”며 “이 위기를 이재명(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식으로 해결할지 윤석열(국민의힘 후보)·안철수(국민의당 후보)·심상정(정의당 후보)식으로 해결할지 토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철학과 현실’ 특별좌담에 참여한 4인의 원로 역시 이번 대선이 대전환기에 한국의 극단적 갈등구조 속에 치러진다고 본다. 이들은 감정이나 직관이 아닌 이성을, 맹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과학정신을 강조한다. 엄 편집주간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축적된 갈등구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식을 되찾고 흑백논리와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영역이 필요하며, 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비판적인 사고와 개방적인 태도, 그리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접근이 요청된다”고 했다. ‘지체된 시대정신’으로서 ‘공정’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형준 교수는 “‘촛불’에 힘입어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공정이라는 가치는 실현되지 않았다”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다시 한 번 ‘공정’”이라고 말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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