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와 함께하던 그 시절, 적수가 없었죠"

김종수 2022. 1. 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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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19)]'황새' 김유택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빅맨은?’이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극히 일부 선수들로 좁혀지는 가운데 성향에 따라서 조금씩 의견이 나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누적 개인 기록의 서장훈, 어떤 조합에도 잘 맞았던 팀플레이의 김주성, 전성기 임팩트 만큼은 단연 최고였던 빅센터 하승진 등이 떠오른다. 워낙 선수층이 얇고 좋은 선수가 나오기 힘든 포지션인지라 누구나 예상하는 인물들 위주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구대잔치 시절 열광했던 팬들이라면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근성과 BQ가 뛰어났던 테크니션 센터 신선우, 악바리로 불렸던 독종 임정명, 최초의 주전급 장신센터 한기범(205㎝) 등 프로농구 이전세대에도 다양한 색깔의 빅맨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최고로 꼽는 빅맨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황새’ 김유택(59‧197cm)이 그 주인공이다.


김유택은 ’천재 센터‘로 불렸다. 중학교 3학년이라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농구의 길로 들어섰음에도 고등학교 졸업반 무렵부터 최고 센터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대학교, 실업 시절에는 쭉 정상의 자리를 유지했다. 선수 시절 말년 서장훈이라는 떠오르는 괴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라이벌 조차 없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전성기 시절에는 한기범이랑 같이 있었잖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김유택이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기아자동차의 선수 구성은 그야말로 역대최고 수준이었다. ’농구대통령‘ 허재와 넘버1 포인트가드 강동희가 함께 백코트를 이뤘고, 김유택과 한기범이라는 최고 센터 둘이 ‘트윈타워’를 구성했다. 국가 대표 경기가 있으면 따로 소집하지 말고 그냥 기아자동차가 나가도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자신의 유일한 적수가 될 수 있는 한기범이 동료로 함께하면서 김유택이 편하게 플레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유택의 진정한 가치는 국제 경기에 있었다. 서장훈, 김주성 등이 국제경기에서 분투했듯이 김유택 역시 당시 국가대표팀이 가장 믿는 구석중 하나였다. 국내에서는 나쁘지 않은 신장이었지만 국제대회를 나가게 되면 김유택은 단신 빅맨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로 인해 근육질 해외센터와 나란히 서게 되면 너무도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김유택은 결코 만만한 빅맨이 아니었다. 근성은 물론 테크닉까지 겸비한지라 자신보다 크고 무거운 상대를 만나서도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장신센터가 앞을 가로막아도 특유의 피벗 플레이와 포스트업을 통해 득점을 올렸고 거리가 떨어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정확한 미들슛을 작렬시켰다. 빠른 발을 활용해 쉴새 없이 뛰어다니며 속공가담을 하고 찬스를 만들었다.


중국전은 물론이거니와 1990년 세계 선수권에서는 강호 스페인을 상대로 29득점을 올리는 등 토종 빅맨의 매운맛을 종종 보여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투지와 기술은 물론 농구 지능 역시 매우 뛰어났다. 작전 수행 능력도 좋았으며 코트 전체를 보는 시야도 넓은 편이었다. 김주성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하는 농구를 잘했고 어떤 패턴에서도 동료들과 호흡을 잘 맞줬다. 거기에 리바운드, 수비 등 궂은일에도 헌신적이었다.


후배 허재가 그랬듯 김유택 역시 시대를 잘못 만났다. 프로농구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장이었다. 식스맨으로 존재감은 보였으나 외국인선수 2인제에서 제대로 된 자리는 없었다. 더욱이 소속팀 기아는 당시 골밑 플레이에 강점을 가진 외인 둘을 앞세워 ‘트윈타워’를 즐기던 팀이었다. 만약 김유택이 젊은 나이였다면 프로농구의 빅맨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분명한 것은 김유택은 기량과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된 빅맨이다는 사실이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뭐, 그냥 열심히 놀고 있습니다.(웃음) 은퇴 후 지도자도 했고 가장 최근까지는 해설위원도 했는데 현재는 쉬면서 여러 가지 생각 좀 하고 있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것인가요?
솔직히 다른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하거나 운명적인 만남 그런 것은 없었어요. 아버님 지인분이 삼일상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사적인 자리에서 부모님하고 얘기를 나누다가 “우리 아들이 키가 큽니다”라는 말이 나왔고 그러자 그분께서 “그럼 어디 한번 보자”고 답을 해서 소개로 농구를 하게 되었죠. 스토리라고는 한줌도 없는 계기였다고 할까요. 그때가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스토리라면 그게 스토리겠네요. 남들보다 많이 늦게 시작한 것.

Q.농구를 늦게 시작한 것 치고는 기본기가 상당히 탄탄하셨어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농구 시작한 이래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거의 쉬어본 적이 없어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훈련을 한 것 같아요. 늦게 시작한 놈이 게으름까지 피우면 답이 없잖아요. 포지션은 처음부터 빅맨 쪽이었어요. 농구를 시작할 당시 188cm 정도 됐거든요. 지금이야 일찍부터 워낙 큰 친구들이 많아서 그 정도는 큰 축에도 안 끼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컸어요. 전체적으로 지금보다 평균신장도 많이 작았고요.

Q.그래도 농구 명문 중앙대를 가셨어요.
중앙대 정봉섭 부장님이 명지고 감독을 잠깐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 인연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는 명지 출신들이 중앙대를 많이 갔어요. 저희 고교 선배 중에서는 한기범 선배가 있겠네요. 사실 제가 농구를 중학교 3학년에 시작했지만 갓 농구를 시작한 선수를 누가 선호했겠어요. 창단한지 얼마 안된 명지고에서 받아준 것만 해도 기적이었죠. 저한테는 어려운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준 정부장님이 참 감사하기도 했어요.

Q.허재 선수가 들어오면서 그야말로 무적 중앙대 시절이 열렸어요.
맞습니다. 당시 최고의 테크니션 허재가 가세한 것으로 중앙대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죠. 저도 어디가서 항상 역대 최고의 선수는 단연 허재라고 속마음을 솔직하게 오픈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중앙대 전성시대는 허재가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됐어요. 제가 1학년 때 중앙대가 춘계대회 우승을 차지했어요. 2학년 올라가면서 허재가 들어왔고요. 허재가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맞지만 이미 그전부터 (한)기범 선배와 저의 ‘트윈타워’가 대학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죠.

 

 

“저는 운동을 하면서 맞아본 적은 거의 없어요”

Q.중앙대, 기아 시절에 다른팀 선배들에게 린치에 가까운 폭력성 수비도 당하고 고생하셨어요. 폭력이라면 지긋지긋하실 것 같아요.
아, 경기에서 고생한 것은 맞는데 농구를 배우면서는 맞아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농구를 너무 잘해서…, 농담이고요.(웃음) 명지고가 빠다가 없었어요. 선배들도 그렇고 지도자분들도 때려서 가르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요. 그 시절 생각하면 대단한 거죠. 그 뒤 중앙대에 올라가서는 맞을 일 자체가 생기지 않은 것 같아요. 워낙 성적이 좋았잖아요. 정부장님이 본래 카리스마도 넘치고 굉장히 엄한 분이시거든요. 하지만 당시 성적 알잖아요. 실업최강팀들하고도 맞짱을 뜰 정도였고 대학 무대에서는 무적이었죠. 보통 우승을 하고 그러면 때리려다가도 멈추고, 훈련량도 줄고 그래요. 예전에는 ‘때려야 잘한다’는 이상한 인식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성적이 잘 나오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던 거죠. 정부장님도 구타 같은 것 일체 못하게 하셨고요. 어찌되었든 그런 면에서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 분위기가 폭력이 많이 용인되던 때인지라 잘하든 못하든 때리기로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서 때리거든요.

Q.운동을 배우면서는 안 맞았지만 시합 중에는 좀 시달리셨어요.
원래 농구라는 스포츠가 몸싸움이 많은 종목이잖아요. 당시 대학 돌풍을 일으켰던 중앙대도 그렇지만 실업무대에 올라가서도 창단팀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나이가 어렸어요. 그런데 농구는 또 잘했어요. 그러다보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화가 나기도 했나 봐요. 나이로 그러면 안되지만, 경기는 안 풀리지 어린 놈들이 너무 잘하지.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쳐다보니까 하나하나 행동거지도 건방져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수비도 거칠게 하고 은근슬쩍 심판의 눈을 피해 과격한 타격이 들어가고 그런 부분이 있었죠. 야구에서 벤치클리어링 같은 것 봐봐요. 서로 흥분하면 선 후배 관계가 흐려지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맞 상대할 때는 후배 쪽에서 기가 죽는게 사실이죠. 저희한테는 나이로라도 보호해줄 선배가 없었고 과격한 상황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선수인데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어요. 경기중 은근슬쩍 까는 것? 못해서 잘 안한게 아니죠. 또 할 때는 야무지게 했죠.

Q.선수 시절 허재에게 주먹을 날린 것으로 유명한 분하고도 펀치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 임달식, 임달식…, 그렇죠. 우리 동기에요. 고려대, 현대 라인이니까 아무래도 우리랑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죠. 대부분 어릴 때부터 농구하면서 다들 안면이 있으니까 폭력을 위한 폭력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이 기싸움 성격이 강합니다. 스포츠라는게 다 비슷할거에요. 힘, 기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기 싸움에서 밀려버리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상대 팀에서도 그걸 노리고 그렇게 나오는 것이고 우리도 그걸 알기에 당하고 있을 수가 없죠. 더욱이 빅맨같은 포지션에서는 기싸움에서 밀리면 아무것도 안되요. 몸싸움, 자리다툼 뭘 할 수 있겠어요. 마음이 죽어버렸는데.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 성격이 거칠고 안 거칠고를 떠나서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 많으니까 그런 부분 때문에 자꾸 충돌하고 서로 까고 그랬던 것이죠.

 

 

“플레이 스타일이 어떻게 만들어졌냐고요?”

Q.농구 구력에 비해 테크닉이 무척 다양하고 좋으셨어요.

사실 우리 때는 지금보다 환경도 안 좋고 디테일한 가르침도 없었어요. 각종 정보나 시스템은 지금보다 훨씬 밀리죠. (이)상민이하고도 가끔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잘하고 싶으면 결국 본인이 노력하고 각성해야 한다. 아무리 지도자가 잘 가르쳐줘도 받아들이는 본인이 제대로 못하면 의미가 없어요. 실업, 프로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았던 선수들은 대부분 계속해서 뭔가를 배우고 채워나갔던 선수들이에요. 지도자가 10개를 가르쳐주면 놓치지 않고 다 배우려고 하고 거기에 더불어 응용을 해서 20개, 30개를 만들어나가는 거죠. 그런 속담도 있잖아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닫는다고’ 제가 잘났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농구를 늦게 시작했으니 남보다 갈 길이 멀고 계속해서 스스로 나의 부족한 점을 생각하고 고치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어요. 개인 스포츠도 아니고 지도자가 나 하나만 잡고 분석하고 챙겨줄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결국 제 스스로가 훈련과정이든, 경기에서건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발버둥 쳤던 것이죠.

Q.빅맨치고 몸이 마르셔서 테크닉 쪽으로 발전한 영향도 있겠죠?
당연하죠. 사람이 그런게 있어요. 마른 몸이다 보니 파워로는 승부를 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럼 억지로 파워를 늘리기보다는 다른 쪽을 발전시키는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마른 대신 강점이 있는 스피드를 살리고 스탭이나 슈팅 등에 신경을 더 쓰고, 어디까지나 살아남으려고 진화시킨거죠.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잖아요. 만약 몸이 좋았더라면 그런 기술이 안 나올 수도 있었겠죠. 좋은 몸뚱이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고 했을테니까요.

Q.특별히 부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별다른 부상 없이 대체적으로 순탄했던 것 같아요. 국가대표 경기 훈련 기간에 최철권 선배 발을 잘못 밟아서 발목을 심하게 삔 것? 그 정도만 생각나네요. 당시 거친 환경과 어설픈 몸 관리를 감안하면 엄청 건강했던 거죠. 단 워낙 말라 가지고 대학교 때는 빈혈로 고생 좀 했어요. 빈혈 때문에 6개월 가량 쉰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워낙 빈혈로 골골거리니까 그 무서운 정부장님이 종아리 같은데 맛사지 해주고 그랬던 기억도 납니다.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는데 특별히 아픈 구석은 없었어요. 전체적으로 좋았는데 딱 하나 헤모글로빈 수치가 운동선수치고 상당히 낮게 나온거에요. 혈액 속에 철분이 적었던 것이죠. 쉬면서 철분제 챙겨 먹고 그랬습니다. 빙빙 돌려서 얘기했지만 쉽게 말하면 사지는 멀쩡했는데 잘 먹고 지내지 못해서 영양결핍이 있었던거에요. 그게 빈혈로까지 이어졌고요. 빈혈 빼고는 잔병치레도 없었고 어디가 잘못되어서 수술받은 적도 없었어요. 몸싸움을 많이 할 수밖에 없던 센터가 그 정도면 선방한 거죠.

 

 

“포지션 중복요? 함께 뛰면 되는거죠”


Q.센터 포지션이지만 한기범 선수와 함께 뛰었다는 점에서 4번 포지션도 많이 맡았을 것 같아요.

사실 중앙대가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반대를 상당히 했어요. 포지션도 같은데 거기로 가면 ‘둘 중 한명은 밀려난다’는게 이유였죠. 이전까지는 더블포스트 개념이 없었어요. 모두 싱글포스트였죠. 공존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생각들을 다들 안 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하도 그러니까 안 들던 걱정도 들더라고요. 하지만 정부장님 집을 방문하고 나서 조그만 기우마저 다 털어냈어요. 정부장님이 다양한 자료를 꺼내놓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나는 이미 더블포스트를 준비하고 있다”며 다양한 전술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주셨어요. 어찌보면 중앙대에서 처음으로 더블포스트라는 개념이 도입됐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 같아요.

Q.포지션 중복문제는 겪지않으셨나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저는 4번도 가능한 스타일인지라 제가 주로 맞춰야죠. 큰 선수 둘이 포스트에 우두커니 서있으면 어수선해서 서로 힘들어져요. 그래서 제가 내외곽을 계속 오가면서 동선이 겹치거나 그러지 않게 신경을 많이 썼어요. 물론 (한)기범 선배도 가능한 선에서 저를 많이 배려해줬고요. 그렇게 서로가 호흡에 대해 신경을 쓰니까 원만하게 더블 포스트 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Q.어찌보면 대구 한국가스공사 신선우 총감독님 선수 시절과 비슷했으려나요?
당시 기준으로 보면 (신)선우형은 워낙에 특이했어요. 센터는 무조건 골밑을 지키면서 몸싸움하고 리바운드하던 시절에 중거리 슛도 과감하게 쏘고 빠른 발을 살려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죠. 파격적인 스타일이었어요. 사실 당시에 센터가 그렇게 하면 욕먹던 시대였죠. 하지만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게 완전 잘 했잖아요. 특히 패싱 능력이 워낙 좋아서 선우형이 들어가면 볼이 매끄럽게 잘 돌아가요. 거기에 슛도 있어서 공간도 넓어지고…, 그렇다고 센터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역할을 못 하던 것도 아니거든요. 신장은 작았지만 워낙 근성도 좋고 파이팅이 넘쳤어요. 선우형이 테크니션 빅맨의 존재를 알렸고 저는 뒤를 이은 케이스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맥도웰과의 승부요? 아휴…, 죽는줄 알았죠”

Q.현대(현 KCC)와 챔피언결정전 7차전 명승부는 지금도 회자됩니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크죠. 상대는 조니 맥도웰, 제이웹이라는 걸출한 외국인 트윈타워가 건재한데 우리는 저스틴 피닉스가 제대로 못 뛰었죠. 외국인 선수의 빈자리 그것도 센터 포지션을 저와 조동기 등 토종 선수들이 대신 맡았습니다. 다들 우리가 쉽게 질 것이다고 예상했어요. 보이는 전력에서 차이가 심했으니까요. 당시 정규리그 우승팀 현대 홈에서 치러진 1, 2차전을 우리가 모두 잡았어요. 다들 놀랐죠. 부산에서 치러진 3차전에서도 이기다 졌어요. 조성원이 막판에 폭발해서 결정적 3점슛이 들어간게 컸죠. 결국 7차전까지 갔고 체력전에서 밀려서 고배를 마셨어요. 일일이 다 밝히기는 그렇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은 시리즈였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을 꼽으라면 역시 체력이었던 것 같아요.

Q.맥도웰과의 매치업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왜 안 힘들었겠어요. 죽을 맛이었죠. 전성기 기량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괴물 같은 선순데 다 늙어서 붙으려니 온몸이 아팠습니다.(웃음) 신장은 제가 조금 더 컸지만 덩치를 봐요. 힘에서는 아예 상대가 안되요. 한번 몸으로 퉁 부딪히면 무슨 바윗돌이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도 죽자살자 악착같이 막았고 그 시즌 끝나고 은퇴하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만류해서 이후 2시즌을 더 뛰게 됐죠. 은퇴를 38살에 했는데 영구결번도 대한민국 스포츠에서 제일 처음했을 거에요. 축구의 누구누구 등이 저보다 먼저 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따지자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먼저입니다.

Q.울산 현대모비스가 기아를 인수하면서 영구결번 문제가 좀 있었어요.
현대모비스가 기아를 가져가면서 우승의 역사도 함께 포함 시켰죠. 말 그대로 구단명만 바뀐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 영구결번 유니폼을 내린 적이 있어요. 그러자 기자분들이 항의를 했나 봐요. ‘우승횟수는 구단 역사에 추가시키면서 왜 영구결번 레전드의 경력은 빼려고 하냐?’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유야무야되며 영구결번이 다시 올라갔죠.

 


“진수의 미국행? 당시 하승진보러 왔다가 이뤄진겁니다”

Q.이현중 선수 이전에 최진수 선수가 미국에서 NBA에 도전했었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크실 것 같아요.

사실 진수는 미국 현지에서 주목받는 선수는 전혀 아니었어요. 한국에 하승진이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선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미국 관계자들이 국내에 들어왔다가 우연히 눈에 띄었어요. 그때가 진수 중학생 때였어요. 곧바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중학생을 데려간다’고 여론이 좋지 못할까봐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어서야 사우스켄트 고등학교로 갔고 메릴랜드 대학까지 다니게 되었던 거죠. 부모로서 안타깝고 미안한 것은 당시 진수가 혼자서 힘들게 미국 생활을 이어나갔어요. 어린 나이이기도 하니까 누가 챙겨주고 관심을 막 가져줘야 하는데 지 엄마도 그렇고 이래저래 여건이 안되어서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했어요. 메릴랜드에서 스카웃 형식으로 가서 기대를 많이 받았거든요. 결국 필요한 학점을 얻지 못했고 그로인해 국내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래저래 지금 생각해도 아쉽죠. 미안하고.

Q.협회 등에서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제대로 쓰지도 않을거면서 국가대표로 차출하는 등 최진수 선수를 더욱 어렵게 했다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진수가 상처도 많이 받고 스트레스도 장난아니었어요. 그렇지않아도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기 힘든 상황에서 자꾸 국가대표팀에서 불러댔잖아요. 결국 제대로 쓰지도 않을거면서요. 여러번 그랬어요.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미래의 기대주라고 생각했으면 해당 선수 입장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가 아니면 가만히라도 놓아두는게 어땠을까 싶어요. 메릴랜드 대에서는 운동선수를 위한 추가 수업도 진행해주는 등 나름대로 배려를 했어요. 고국에서 배려를 못해준 거죠.

Q.프로에서의 첫 시즌 때 오세근과 라이벌로 불릴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는데 이후에 이어가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보는 사람마다 조금씩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제 사견을 말해보자면, 진수는 미국에서 빅맨으로 농구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스윙맨이었죠. 빅맨으로서의 플레이는 요구하지도 않았고 배울 필요도 사실상 없었죠. 하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달라져요. 진수 정도 신장이면 포스트업을 해야되요. 미국에 있을 때와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환경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어릴 때 배우지 못한 포스트업을 다 커서 프로 무대에서 익히려면 잘 안되는거죠. 본인도 이러한 점을 의식해서 뒤늦게 노력을 했겠지만, 그러다 보니 본래 잘하던 스윙맨 스타일까지 죽어버리게 됐어요. 결론적으로 이것저것 다 안됐다고 보는게 맞는 것 같아요. 자신만의 농구를 잃어버린 거죠.

Q.첫 시즌 때는 굉장히 투지가 넘쳐 보였어요. 빅맨들이 버티고있어도 개의치 않고 골밑으로 들어가 우당탕탕 부딪히면서 싸우듯이 플레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까 미친놈이죠.(웃음) 그렇게 자꾸 들이대니까 부상도 당하고 그랬죠. 상황에 따라서 강약조절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신인이라 그랬는지 너무 대가리 박고 하더라고요. 가서 부딪힐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거잖아요. 의욕이 너무 넘쳤어요.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은 보기 좋은데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Q.신인 때 기대치에 비해서 크게 성장하지 못했어요.
진수가 농구를 배웠던 미국과 한국은 다르거든요. 모든 지도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미국은 농구가 많이 달라요. 미국은 이것저것 다 시켜보고 나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한국은 뚜렷한 자신만의 신념(고집)이 있는 감독이 많아요. 본인의 틀에 선수를 놓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죠. 그러다보니 예를 들면 ‘너는 슛만해. 어설프게 다른 것 하지 말고’ 혹은 ‘슛도 약하면서 뭘 하려고 그래. 수비하다가 기회 오면 받아서 드라이브인 들어가’라는 식으로 딱 정해진 역할만 하기를 원하죠. 예전 농구가 더 심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런 지도자들 꽤 있어요. 진수같이 미국에서 농구를 했던 친구들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죠. 이른바 신바람이 날수가 없어요. 물론 그게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성적도 나오고 그러면 그게 지도자의 색깔이 되기도 하죠. 어쨌든 지도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선수도 지도자를 잘 만나야되요. 서로간 궁합이 맞아야 능력치를 더 많이 발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정부장님같이 깨어있는 지도자를 안 만났으면 어떤 선수가 되었을지 짐작이 안가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감독에게 맞출 수 있는 선수’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팀을 이끌어가는 것은 감독이잖아요. 다소 본인과 맞지 않더라도 감독이 원하는 것을 빨리 파악해서 적응한다면 출장기회도 많아지고 성공할 가능성도 높겠죠. 그런 선수가 바로 유능한 플레이어입니다.

Q.새삼 꺼내기도 조심스럽지만 김진영 선수가 사고를 쳤잖아요.
휴…, 어느 부모든 마찬가지일거에요. 생각만 하면 속 터져 죽겠어요. 팬분들께도 죄송하고 이래저래 할말이 없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운동선수로서는 물론이고 성인으로서도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이었죠. 이상민 감독에게도 미안해 죽겠습니다. 당초 김시래와 진영이를 축으로 가드진을 운영하고 차민석까지 해서 키워보려고 했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이 사고 치는 바람에 다 헝클어져 버렸죠. 일단 가드로서 신장이 크고 발도 빠른 편이라서 쓰임새가 많거든요. 학창시절에 1번으로도 자주 뛰어봐서 시야나 리딩도 나쁘지 않고요. 상황에 따라서는 1, 2, 3번 소화가 모두 가능해요. 가드로서는 팀 평균신장도 높여 줄 수 있고요. 그래서 기대가 컸는데 그렇게 됐네요. 프로의 세계에서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지라 올 때 잡아야 하는데 본인에게도 손실이고 구단에게도 큰 피해를 끼쳤고 팬분들께도 너무너무 죄송한 일입니다.


“꼬장꼬장? 원칙에 충실한 성격이었습니다”

Q.선수 시절에 선배로서 그렇게 꼬장꼬장하셨다고 들었어요.

꼬장꼬장? 그보다는 FM적인 성격이었다는게 맞을거에요. 누구를 집요하게 못살게 굴거나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서 후배들을 괴롭히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다만 저만의 원칙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후배들이 힘들어 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예능프로에서 보니까 제 양말을 못찾아서 후배들이 새양말 사다주니까 싫다고 원래 신던 제 양말 가져오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을거에요. 제가 좀 깔끔하고 까칠한 부분이 있기는 해요. 후배들을 괴롭히려고 그런게 아니라 제가 그런 부분에서는 확실한 편이에요. 예전에 막 양말도 뒤섞여서 남의 양말 신고 그런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게 싫었어요. 표시하려고 제 양말에다 점찍어놓고 그랬던 기억도 나요. 내것은 내거고 내것 아닌거는 아닌거죠. 후배들 입장에서는 제가 좀 두루뭉술했으면 좋았을거에요. 하지만 후배 시절부터 원칙에 충실한 성격이다 보니 피곤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Q.덕분에 고기굽는 스킬을 배웠다는 후배도 있었어요.
운동선수들 식성이 얼마나 좋아요. 특히 젊은 친구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때에요. 그러다보니 이 녀석들이 고기를 구울 때 보면 제대로 익지도 않았는데 막 가져다 먹어요. 잘 익어야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먹는 사람만 먹고 제대로 못 먹는 사람도 생기잖아요. 그럴때면 “기다려. 제대로 익으면 먹자” 그렇게 스톱을 시키죠. 더불어 불판은 한정되어있는데 많이 먹을 욕심에 우르르 고기를 붓는거에요. 그러면 막 겹쳐져셔 제대로 익지도 않고 구워지는 시간도 더 오래 걸려요. 차라리 줄 맞춰서 착착착 올려야 시간도 절약되고 더 많이 구워질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 간섭을 했더니 고기굽는 스킬 등의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요.(웃음)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김유택을 기억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기억되는 것은 팬분들의 사랑입니다. 농구를 아무리 잘하면 뭐합니까. 팬들께서 응원해주시니까 이름도 알리게 되었고 이렇게 프로농구도 성행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선수들에게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인지라 잠시라도 이러한 부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늘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더 잘하지 못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 때면 죄송한 마음도 큽니다. 요새 농구계에 좋은 소식도 많이 들려오는데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고 팬분들께서도 더욱 관심을 가져주셔서 농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기 스포츠로 더욱 성장했으면 하는 바램 가져봅니다. 날씨도 춥고 코로나로 인해 경기도 위축되었지만 조금씩만 더 기운 내고 함께 파이팅 했으면 좋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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