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11] 폴 세잔과 아버지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2. 1. 1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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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신문을 읽는 화가의 아버지', 1866년, 캔버스에 유채, 200×120㎝,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 농사’라는 말은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1839~1906)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을 두고 나온 것 같다. 남프랑스의 은행 창업주였던 그는 외아들 폴이 가업을 잇기 바라며 법대에 보냈다. 폴은 법대에 입학은 했으되 다니기는 미대를 다니다, 친구 에밀 졸라를 따라 파리로 떠나 화가가 됐다. 매달 돈을 받아 쓰며 동거녀와 몰래 자식까지 낳고 나자 루이 오귀스트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결국은 생활비를 두둑하게 올려주고 말았다.

폴 세잔은 돈 걱정 없이 그림만 그렸는데도 온통 어두운 물감을 나이프로 두껍게 발라 거칠고 투박한 그의 그림은 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1863년, 첫 전시가 화가들의 등용문이던 파리 살롱에서 탈락한 작품만 모아 선보였던 낙선전(落選展)이었다. 매년 줄기차게 탈락만 하던 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사를 통과해 파리 살롱에 전시했던 게 바로 아버지를 그린 이 작품이다. 루이 오귀스트가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 눈을 찡그린 채 투박한 손으로 움켜쥔 신문은 ‘레벤망(L’Événement)’. 1865년에 창간해서 1년간 발행되다 폐간된 신문인데, 여기에 에밀 졸라가 소설을 연재했다. 루이 오귀스트가 제일 못마땅하게 여기던 친구가 에밀 졸라였는데, 하필 그 신문을 손에 쥐여 주고 초상화를 그리는 아들이라니. 그런데 하필 그 그림으로 살롱에 입선을 하다니. 자식처럼 얄궂은 이 또 있을까.

폴 세잔은 아버지로부터 요즘 가치로 100억원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 1000억원대에 거래된다. 루이 오귀스트의 영혼이 있다면, 마음대로는 안 됐지만 그럭저럭 성공한 자식 농사였다고 꼭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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