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中 훈센, '중국 대리인' 자격으로 미얀마 방문했나

정지섭 기자 2022. 1. 11.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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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의장 되자 첫 방문국 택해
군부와 휴전 연장 등 합의문 발표
中·미얀마와 '삼각 연대' 구축
지난 7일(현지 시각) 미얀마를 방문한 훈 센(왼쪽) 캄보디아 총리가 수도 네피도 공항에 도착해 운나 마웅 르윈(오른쪽) 미얀마 외교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캄보디아를 37년째 통치 중인 훈 센 총리가 올해 동남아 정세를 좌우할 ‘키 플레이어’로 떠오르고 있다. 훈 센은 지난 7일(현지 시각)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의장 자격으로 미얀마 수도 네피도를 전격 방문,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 사령관을 만났다. 지난해 2월 쿠데타로 집권한 뒤 임시 총리를 자처하고 있는 민 아웅 흘라잉으로서는 외국 정상과의 첫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회동 뒤 공동성명에서 소수민족 무장세력과의 휴전 연장 등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 미얀마 군부는 훈 센의 방문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며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훈 센은 8일 페이스북에서 “이번 회동을 통해 두 나라가 양자 관계를 강화하고 국제사회에서도 더욱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훈 센은 캄보디아가 회원 10국이 알파벳순으로 1년씩 돌아가면서 맡는 의장국을 수임하자 첫 방문국으로 미얀마를 택했다. 아세안 의장국은 동아시아정상회의(EAS)와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 등 아세안 주도 다자회의의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훈 센은 미얀마 문제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훈 센이 미얀마를 꽁꽁 감싼 얼음장을 부쉈다”며 반군부 시위대에 대한 유혈 진압으로 고립무원 신세인 미얀마 군부와 국제사회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51년 태어난 훈 센은 혼돈의 연속이던 캄보디아 근대사에서 진영을 절묘하게 바꿔가며 정치적 거물로 성장해왔다. 캄보디아는 1인당 GDP(1643달러)가 아세안 10국 중 9위에 불과한 빈곤국. 1970년대 이후에는 군부 쿠데타 세력, 급진 공산 세력(크메르루주), 친베트남 세력, 입헌군주제 등으로 국가 체제가 여러 차례 바뀌며 혼란이 지속돼왔다. 이런 격변 속에서 그가 장기 집권하도록 도와준 최대 후원자는 중국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2020년 2월 코로나 발생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훈 센 총리에게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 특수한 시기에 캄보디아 국민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양국의 우호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캄보디아는 직전 아세안 의장국이던 2012년, 중국과 아세안의 갈등이 첨예하게 표출됐던 남중국해 분쟁 관련 공동성명 채택을 이웃나라 반발을 무릅쓰고 무산시켰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친중 노선을 유지해왔다. 중국도 각종 유·무상 원조와 채무 탕감 등을 통해 캄보디아를 중국의 영향권 내에 둬왔다.

최근 캄보디아와 중국 관계는 동맹 수준으로 깊어지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해 9월 훈 센 총리와 만나 2억 7000만달러(약 3237억3000만원) 규모의 원조를 약속했다. 미·중 갈등이 깊어지자 훈 센은 더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 미국이 지난달 친중 노선과 부패·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캄보디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발표하자, “현재 보유 중인 미국산 무기를 파악한 뒤 폐기 조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군부가 장악한 미얀마도 친중 진영으로 기울고 있다. 미얀마는 지난달 중국에서 양도받은 공격형 잠수함의 취역식을 가졌다. 앞서 9월에는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을 경유해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인도양 철도’가 개통돼 본격 운행을 시작했다. 훈 센이 아세안 의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미얀마를 방문함으로써 ‘중국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런 상황을 미국은 경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무·상무·재무부가 합동으로 캄보디아 기업의 부패·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미 기업들에 ‘캄보디아 사업 주의보’까지 발령했다. 노골적인 친중 행보를 보이는 훈 센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훈 센 체제의 향후 변수는 70대로 접어든 나이와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이다. 2018년 총선을 치르기 전 야당을 강제 해산해 국제사회에서 불법 독재 정권으로 낙인찍혀 있는 점도 부담이다. 이런 상황에서 훈 센이 택한 카드는 ‘총리 세습’이다. 훈 센은 지난달 차기 총리감으로 자신의 맏아들 훈 마넷(44) 군 부사령관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의 발표에 집권 국민당 상임위와 중앙위가 잇따라 지지 성명을 냈다.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훈 마넷의 학력이 현지 일간지에 소개되는가 하면, 최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안보위원회 서기와 만나는 등 중요 외교 안보 일정도 수행하고 있어 사실상 훈 마넷의 승계 작업이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훈 센은 지난달 29일 국방부 신청사 준공식에서 “총리직에서 물러나면 총리 정년을 72세로 제안하고, 2023년 이후에는 총리의 아버지가 될 것이고 2040년 이후에는 총리 할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왕, 한발 더 나아가 태상왕 노릇까지 하겠다며 사실상 종신 집권 의지를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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