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당신의 마음을 읽어줄 통역사
대통령 선거는 정반대다
봉 감독이 고른 샤론 최처럼
밥상을 엎지 않을 후보는?
샤론 최(최성재)가 지난달 초 한국외대에서 처음으로 강연을 했다.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때부터 미국에서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할 때까지 봉준호 감독 옆에 통역사로 늘 이 영화학도가 있었다. “영화는 모르고 봐야 가장 재밌다”를 “The film is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로 옮기는 솜씨로 이목을 사로잡은 ‘수상 시즌의 숨은 MVP’였다. 지난해에도 영화 ‘미나리’ 배우들의 국내외 인터뷰를 도왔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캠페인을 벌인 200일 동안 샤론 최는 인터뷰 600회, 관객과의 대화 100회를 포함해 약 1000회를 통역했다. 하루 평균 5회. 살인적인 레이스였다. 표를 얻으려면 마음부터 얻어야 했다. 샤론 최는 강연에서 “아카데미 경쟁작들의 감독, 배우, 스태프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기생충’ 팀이 이방인이 아니라 동료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리셉션과 파티에 빠짐없이 참석해 영화 이야기를 통역하기 위해 봉 감독의 화법부터 말에 담기지 않는 의도까지 연구할 정도였다.
샤론 최는 전문 통역사가 아니다. 미국에서 산 경험이 있고 이중 언어 구사자라 현지 영어를 잘하겠거니 짐작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The film is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도 ‘기생충’ 리뷰들을 찾아 읽다가 발견해 메모해 둔 표현이었다. 바쁜 와중에 영미권 기사들을 훑으며 쓸모 있는 문장은 따로 기록했고, 적재적소에 사용한 것이다.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어떤 기회가 왔을 때 무섭게 성장하는 노력파”(최성은 한국외대 교수)였다.
진짜 일은 “오스카 수상작은 ‘기생충’!”이 호명되는 순간 시작됐다. 샤론 최는 전 국민이 열광할 때 가장 마음 졸인 사람이었다. 불안과의 끝없는 사투. 샤론 최는 통역을 ‘완벽하게 차려진 밥상을 들고 나르는 일’에 빗댔다. 행여 말을 잘못 옮겨 밥상을 엎을까 봐 조마조마했다는 것이다. 봉 감독은 수상 소감을 귀띔해준 적이 없었다.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서 다른 감독들과 나누고 싶다”는 말도 그랬다. 샤론 최는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필요한 말만 간결하게 딱 하고 빠졌다.
최근 출간된 책 ‘번역하는 마음’에 따르면 세상은 온통 번역이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고 삶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듯이 언어가 있는 곳에 번역이 있다. 그래도 생각과 말 사이에는 크고 작은 틈이 존재한다. 생각을 말로 충분히 표현한다 해도 의심과 오해, 손실 없이 상대방에게 닿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영화는 모르고 봐야 가장 재밌다지만 대통령은 정반대다. 그가 대한민국을 어느 방향, 어떤 속도로 운전해 갈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가속이나 감속은 부드러운지, 기상이변에 대처할 순발력은 있는지,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지, 사과하고 수정할 수 있는 인격인지, 분노 조절 장애는 없는지, 국민에게 편안한 승차감을 줄 수 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운전대를 맡길 수 있다.
대통령 선거는 봉 감독이 샤론 최를 골랐듯이 국민의 마음을 깊이 읽고 대신 말해줄 통역사를 선택하는 일과 같다.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라고 샤론 최는 말했다. 왜 이 단어를 썼는지, 왜 이런 식으로 단어를 배치했는지, 왜 문장을 이렇게 끝맺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번역은 조악해진다. 대선 후보들이 하는 말로 한번 가늠해볼 일이다. 머슴으로 일할 준비는 되었는지, 밥상을 엎을 사람은 아닌지, 희망의 등불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보다 당신의 고통에 공감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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