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가슴에 묻고 '가장 고통받는 자' 품어준 배은심 어머니.."

한겨레 2022. 1. 1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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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고 배은심 여사 영전에
1986년 가을 광주 지산동 자택에서 찍은 배은심(오른쪽) 어머니·이한열(왼쪽) 열사 모자의 마지막 생전 사진.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너는 곧 돌아올게요, 라고 말했지. 네 침대 위에 있던 시든 잎들을 거두고 네 유품들을 천으로 덮었다. 하얀 천 위에 흰 자작나무가 놓여 있네. 아가, 봄이 왔다’

1919년 2월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일기 한 대목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3·1운동 전야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는 전장으로 불려 나간 18살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는다. 이후부터 그는 아틀리에 예술을 거부하고 삶의 고통, 그 도저한 밑바닥을 형상화한다. 지극한 모성은 파시즘의 광기가 코로나19처럼 창궐하던 시대에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연대와 공감의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이한열은 21살, 유독 이마가 환하게 빛나는 청년이었다. 가슴에는 군사독재를 향한 시퍼런 의분이 들끓었다. 1987년 6월 9일 그는 또래 청년 박종철을 고문으로 살해한 전두환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대열에 앞장섰다. 콜비츠의 아들, 페터의 머리를 관통한 쇠붙이처럼 최루탄 역시 그렇게 한열이의 푸른 머리에 박혔다. 그가 사경을 헤매이던 6월의 거리는 민주공화국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국민들이 성난 파도가 되어 넘실거렸다. 간난신고로 점철된 민주화운동지혈사 중에 유일한 승리의 흔적, ‘6·29 선언’을 들었다는 듯이 7월5일 그는 눈을 감았다.

1987년 7월 5일 서울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고 이한열군 입관 때 오열하는 배은심 어머니.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이후부터 어머니 배은심의 삶은 ‘한열이 엄마’의 껍질을 벗어버렸다. 오랜 시간 고치 안에 머물다가 마지막 탈각으로 날개를 달고 여린 몸짓으로 비상하는 나비처럼. 부모는 죽어 청산에 묻지만 자식은 엄마의 가슴에 묻힌다. 한열이를 가슴에 품은 어머니 배은심의 날개는 더욱 강고하고 넓어져 갔다.

김치 담그던 손으로 유인물을 배포하고,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긴 세월 숱한 밤을 농성천막 안에서 보냈다. 민주화를 위해 산화해간 이들이 단순한 과거사에 머물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한 교훈과 지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의 일로 풍찬노숙을 일삼았다. ‘다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그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뒤범벅되어야 한 발짝 한 발짝씩 온다’고 한 편의 시 같은 말도 남겼다. 배은심의 발걸음은 단순히 아들의 한에 머물지 않았다. 노동 현장, 세월호의 어린 원혼들이 배회하는 곳 등을 함께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고투하는 현장이면 늘 배은심 어머니가 있었다.

1985년 5월, 광주학살의 책임을 처음으로 드러내놓고 5공정권에게 추궁한 ‘미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을 계기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가 결성되고 이후 기존 양심수들과 함께 ‘민가협’이 출범했다. 실로 무수한 어머니들이 거리의 집회 현장, 농성장, 감옥의 면회 투쟁, 시위 현장을 가장 뜨겁게 달구었다. 성고문 피해자를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팔아먹는 좌경분자’로 매도하는 검사를 향해 신발과 잉크병을 던지다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청년들이 일구었다. 미완의 혁명, 4·19와 광주5·18과 87년 6월 민주항쟁의 전위에는 늘 청년의 자각과 헌신이 있었다. 눈에 미발사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 바다에 수장된 김주열, 아! 그리고 계엄군의 탱크에 맞선 전남도청 안의 그 청년들. 그리고 수많은 이한열과 박종철들. 어느 민족 어느 국가든 간에 청년은 미래의 동량이다. 그들이 민주주의의 빛이었다.

지난 9일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별세한 배은심 어머니는 11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 잠든다. 아들 이한열 열사 대신 민주화 현장을 지킨 지 35년 만이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러나 아직 많이 부끄럽다. 배은심 어머니 영전에서 새삼 돌아본다. 광주학살의 발포 책임자도 밝히지 못하고, 간첩조작을 일삼은 자들을 징벌하지 못하고, 선진국에 진입한 경제력에도 젊은 노동자들이 ‘산재’로 죽어간다. 남은 자들의 몫이다.

널리 알려진 소설 <어머니>의 작가 막심 고리키는 그의 필명인데 뜻이 ‘가장 고통받는 자’라고 한다. 배은심 어머니는 ‘막심 고리키’이며 또한 ‘케테 콜비츠’이다. 소설과 그림, 조각 대신 몸과 삶으로.

필자는 생전에 배은심 어머니를 자주 뵈었다. 고생한다며 안아주시던 그 품의 향기가 아직 남아있다. 부디 하늘에서 편안하소서!

유시춘/작가·<교육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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