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콘트라바스의 꿈

정혁준 2022. 1. 1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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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가장 낮은 음의 초라한 존재감
소프라노 향한 짝사랑과 대비
상황 맞는 클래식음악도 재미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무대 조명이 켜지면 경사진 사각 무대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다. 옆에는 콘트라바스(더블베이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6m×6m 크기의 무대는 6도가량 기울어져 있다. 위태로운 섬처럼 느껴진다.

지난 7일 막을 올린 <박상원 콘트라바쓰>는 이런 비대칭적이고 위태로운 무대에서 배우 박상원이 나와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이날은 이 연극 재연 첫 공연이었다. 앞서 2020년 11월 박상원은 데뷔 41년 만에 처음으로 1인극에 도전했다. 초연 때 있었던 소파, 탁자, 전축 같은 소품은 이번엔 사라졌다. 초연 당시 110분이 넘었던 공연 시간도 90분으로 줄었다.

박상원은 콘트라바스를 연주하는 국립오케스트라 단원이다. 그가 오케스트라 셋째 줄 구석에 앉아 연주하는 콘트라바스는 가장 큰 현악기 가운데 하나로, 가장 낮은 음을 담당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무게감을 더해주지만, 현이 너무 굵어 악상 표현이 무디고 빠른 연주도 힘든 악기다.

공연이 시작되면 박상원은 경사진 무대에 버티고 서서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바스의 존재감을 얘기한다. 콘트라바스가 얼마나 중요한 악기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짝사랑하는 고음의 소프라노 세라를 얘기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콘트라바스의 존재감을 강조했지만, 짝사랑하는 사람은 그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박상원은 자신의 초라함을 토로한다. 그러다 오케스트라와 콘트라바스에 분노한다.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오케스트라에서는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냉엄한 능력별 계급제도, 옛날 옛적에 내려진 결정을 그대로 고수하는 잔인한 계급제도, 재능에 따른 냉혹한 계급제도 등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불합리를 항변할 용기도, 뛰쳐나올 용기도 없다.

박상원은 혼자 홀짝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풀쩍 춤을 추기도 한다. 콘트라바스를 직접 연주하기도 한다. 거친 자갈을 밟으며 걷기도 한다. 공연 중간중간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며 다정하게 다가서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과 함께 다가온다.

연극은 콘트라바스와 그 연주자를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세상이 나(내가 하는 일)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데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나(나의 일)에 대한 자존감이 그리 높지도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100분가량의 1인극이라고 해도 지루하지 않다. 독백 틈틈이 클래식 음악이 대사와 상황에 맞게 흘러나와 듣는 재미를 더한다. 브람스, 바그너,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슈베르트, 말러의 음악이 적절하게 배치돼 음악극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아이러니한 그의 감정도 클래식 음악과 함께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쾨헬번호 334) 3악장 미뉴에트가 흘러나오면 박상원은 “유명한 작곡가라면 대중의 관심을 받고 싶었을 테니 콘트라바스를 위한 곡을 쓰지 않았겠죠”라며 존재감 없는 콘트라바스를 평가절하한다. 막상 콘트라바스를 위해 작곡된 디터스도르프의 ‘콘트라바스 콘체르토’ 1악장이 들리면 박상원은 “전 정말 못 들어주겠어요”라며 곡이 아름답지 않다고 또다시 평가절하한다.

이 역시 콘트라바스를 투영해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남에게 콘트라바스(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만, 나 역시 콘트라바스(나)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독백이다.

<박상원 콘트라바쓰> 공연 사진.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연극 마지막에 박상원은 공연에서 콘트라바스를 연주하다 갑자기 소프라노 세라를 절규하듯이 외치겠다고 얘기한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인다.

세라는 콘트라바스와 소프라노의 음역만큼이나 합을 맞추기 어려운 짝사랑이라는 걸 보여주지만, 누구나 가슴에 하나쯤 품고 사는 꿈이나 자유를 상징한다.

박상원은 세라를 외칠 것인가? 세라를 외치는 순간 그는 평범함에서 벗어나 세상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직장을 잃을 것이다. 연극은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송어’ 1악장이 청명하게 흘러나오면서 끝을 맺는다. 이 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그리고 콘트라바스로 이뤄진 편성이다. 슈베르트는 저음을 강화하기 위해 제2바이올린을 빼버리고 콘트라바스를 배치했다.

<박상원 콘트라바쓰>는 <향수> <좀머씨 이야기>로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동명 희곡이 원작이다. 공연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에스(S)씨어터에서 30일까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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