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전쟁 막는' 반도체 공약 왜 없나

박정일 2022. 1. 1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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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산업부장

"미국이나 중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으려 한다면 그 이유는 반도체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해 재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60% 이상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책임지고 있어서다. 작년 3분기 기준 두 회사의 D램 시장 점유율(이하 매출 기준)은 71.2%, 두 기업의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53.8%다.

메모리 없이 4차 산업혁명은 불가능하다. 인공지능(AI)이나 자율주행, 사물인터넷(IoT) 등 혁신기술은 모두 지금보다 엄청나게 많은 빅데이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겠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두 회사는 미국이나 중국 업체들처럼 자국 정부의 보호 없이 실력만으로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국내 공장이 가동을 멈춘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최소 10년 이상 늦어질 수 있다. 기술은 차치하더라도 중국이나 미국 마이크론, 일본 키옥시아(전 도시바메모리) 등 경쟁사들이 두 회사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수백조원의 천문학적인 투자와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 반도체 치킨게임 시기였다면 가능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위 5개 업체가 전체 메모리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대안이 없다. 자동차와 스마트폰 등 필수품목의 생산 차질이 발생하는 등 반도체가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최근 2년 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충분히 경험했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진입하면서 그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수요 급증에 힘입어 세계 반도체 매출은 2019년 바닥을 찍고 3년 연속 성장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0년 4926억 달러로 전년보다 11% 늘어난 반도체 매출이 지난해 무려 25% 성장한 6140억 달러(약 740조원)에 이르렀고, 내년에도 11% 증가한 6806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누구나 다 아는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새삼 되짚은 이유는 이번 대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세계 각국은 반도체 패권을 잡겠다며 국운을 걸고 다투고 있는데, 우리 대권주자들의 입에서 국가 전략산업 지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들어본 일이 없다.

분노한 부동산 민심, 노동조합과 자영업자, 그리고 심지어 탈모인까지 챙기는 선심성 공약이 쏟아지는 와중에 경제정책은 실종됐다. 여성가족부 폐지 같은 편가르기 식 공약도 지금 시급한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이어졌던 뿌리깊은 반기업 정서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과 중국, 양대 강국은 지금 총성 없는 전쟁 중이다. 미국은 안보 등을 이유로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고립시키기 위한 동맹을 구축하는 등 전방위 압박 중인 가운데, 중국도 강력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미국 기업을 흔들고 있다.

화웨이와 월마트 등 특정 기업을 정부가 대놓고 공격하는 상황도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은 우리 정부의 도움 없이 양국 정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처지다.

반도체 전쟁은 이미 수년째 이어지고 있고, 향후 대만 등에서 실제적인 무력시위가 일어나는 것도 지금 글로벌 공급망 갈등 상황이라면 이상하지 않다. 우리나라 역시 양국이 예의 주시하는 관심국가 중 하나다.

반대로 보면 대한민국에는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반도체가 있기에 주권을 지킬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당장 코로나19 극복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이어지는 경제 패권다툼에서 K-반도체의 위상을 지키는 것은 최소 10년 뒤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판단한다.

'문제 해결형 리더'도 좋고 '상식과 공정'이 굳건한 대권주자도 좋다. 그러나 지금은 급변하는 글로벌 정세 속에서 누가 더 올바른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가 더 시급하다. 선심성 공약은 충분하니, 이제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선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일 산업부장 comja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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