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문제 해법 없는 잔인한 말잔치

한겨레 2022. 1. 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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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일 오후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기초생활보장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등 단체 회원들이 생계급여 현실화와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정성철 |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모든 이슈가 바이러스와 방역으로 수렴되는 불평등한 위기의 2년을 경유하며 대통령선거를 맞았다. 대선 관련 소식을 접하는 게 탐탁지만은 않다. 어떤 소식은 괴롭기까지 하다. 빈곤과 불평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해법은 제시하지 않는, 말잔치만 이어지기 때문이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들러리로 삼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묵인한 역사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빈곤 문제가 수단으로 이용되게 하는 해악을 만들어냈다. 빈곤 문제는 누군가에겐 숙연해지는 불편함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막연한 두려움이겠지만 실제 빈곤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생사의 촌각을 다투는 문제이다.

문재인 정부의 포용국가는 실패했다.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공약을 파기하고 기준 중위소득 현실화를 나중으로 미뤘다. 그사이 가난한 사람들의 사망 소식이 끊이지 않고 언론에 보도됐다. 자살 관련 통계를 보면 스스로 생을 마감한 4명 중 1명은 그 이유로 ‘경제적 문제’를 꼽는다. 그 와중에 한국이 경제순위 10위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혼란스럽다. 경제가 성장하고 정부 예산이 늘어나는 사회에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는 없다. 물론 이게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정부 예산이 300조원대였던 2011년 당시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수는 146만9천명으로 인구 대비 2.9%였다. 2021년 수급자 수가 2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신규 유입된 수급자 대다수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된 주거급여만 받는 수급자다.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수급자 수는 각 146만7천명, 144만3천명으로 인구 대비 2.8%에 불과하다. 2011년 16.5%였던 빈곤율은 2020년 15.3%로 1%포인트 하락했을 뿐이다. 300조원이 늘어난 정부 예산은 어디에 사용되었나,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난한 이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작년 10월 정부가 60년 만에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한 뒤 사무실로 두 종류의 전화가 왔다. 먼저 수급자가 아니고 수급자를 친구나 지인으로 두지도 않았으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의 축하 전화였다. 그런 전화가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비통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되었다는 소식에 주민센터를 방문했다가 폐지가 아닌 완화라는 사실을 알고 돌아선 사람들의 분노와 한이 섞인 절망의 전화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생계급여에서 완화된 부양의무자의 소득 연 1억원, 재산 9억원 기준을 초과해 탈락하고, 부양의무자에게 연락이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급신청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돈 만원이 없거나 부담돼 기초 의료 이용마저 포기하고 아픔을 참으며 병을 키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이런 현실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들의 말잔치가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나.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제도의 변화로 가난한 사람들 삶이 달라질 건 없다. 과거 빈곤층의 사망 소식에 ‘비수급’ 혹은 ‘수급 탈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면 이제는 ‘주거급여 수급자’가 붙을 뿐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한다고 심화되는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수급자가 되어도 살기 힘든 현실, 복지제도의 확대와 빈곤층이 접근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그리고 안전하고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 사회정책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 가난한 이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는다면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겠다면서도 뿌리 깊은 편견에 기댄 빈곤층 혐오를 담아내는 기만, 가난한 이들의 삶을 새로운 정책실험의 장으로 여기는 오만으로는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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