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DJ 美 망명 시절부터 한국 민주주의 지원했던 강대양 선생 별세

2022. 1. 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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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5일 미국 LA 성삼한인천주교회에서 장례 미사 치러

[프레시안 알림]
1980년대 미국 망명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박지원 현 국정원장과 신건 전 국정원장을 소개한 건제(建弟) 강대양(姜大洋) 씨가 지난 6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진주 강씨(晉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로스앤젤레스 대문중의 시조다. 

고인의 장례 미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성삼한인천주교회(Sung Sam Korean Catholic Church)에서 오는 25일 오전 10시에 치러지며 하관식은 당일 오전 11시 30분이다. 장지는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Forest Lawn Memorial Park)다.

유가족으로는 미망인 강금례 씨와 자녀 치원·린다·형원·우원이 있으며, 자부/사위로는 진균·배현·데이지·윤희가, 손자로는 성화·현·지은·성호·성진·민성·성우가, 손부/손사위로는 에마누엘라·마리오·그레그가, 증손자로는 진주·은하가 있다.

○ 장례 미사 주소 : 성삼한인천주교회(1230 N. San Fernando Rd, Los Angeles, CA 90065 USA / +1-323-221-8874)
○ 장지 주소 :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1712 S. Glendale Ave, Glendale, CA 91205 USA)
○ 진주 강씨 로스앤젤레스 대문중 주소 : 4033 W. 7th St. Los Angeles, California 90005-3504 U.S.A.

▲ 진주 강씨(晉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로스앤젤레스 대문중 시조 건제(建弟) 강대양(姜大洋) 씨. Photo © Hyungwon Kang

15살 가장이었던 故 강대양

고인은 육남매 중 둘째로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둘째 아들 생일날 전라남도 영암 주민학살 사건에서 피살된 아버지, 그리고 서울에서 유학하다 행방불명 된 큰형을 대신해, 동생 네 명과 홀어머니를 책임지며 15살부터 집안의 가장으로 살아왔다.

고인은 몰락한 집안 형편에 서울 성동중학교를 합격하고도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독학으로 한학 주역 등을 공부해 전북 고창 향교 춘추제에 제관 입명 받는 유생으로, 모범적인 지역사회 지도자로, 보건소 없는 동네아이들의 예방주사 접종을 직접 시술했다. 

군 복무는 미국 제8군 카투사(KATUSA)로 미군 대구기지 사령부에서 복무했다. 미군 타이피스트 미스최는 "부대 생긴 후 창고 열쇠를 한인에게 맡기기는 강대양 병장이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군 복무에 최선을 다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군복무가 3개월 연장돼 총 35개월을 복무했으며, 제대를 앞두고는 '모범 병사 표창'을 받았다.

고인은 또 가장으로 동생 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막내 동생 강대인 씨가 휘문고를 거쳐 경희대 치대를 졸업하고, 1976년 미국으로 유학과 이민을 갈 때까지 내내 뒷바라지를 했다. 

고인은 미국에 온 첫 해 대한통운에서 근무했으며, 미국 중장비 기술자노동조합 International Union of Operating Engineers Local 12(IUOE Local 12) 소속으로 불도저 기술자로 일했다. 이후 한국 군복무 후 이민을 온 큰아들 치원 씨와 'Unocal 76' 주유소를 27년간 운영했다.

김대중 "강대양이 소개한 인재들, 많은 도움 됐다"

고인은 1983년 미국 망명 중인 김대중 씨를 훗날 대통령으로 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만들어낸 후원 단체인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립 때부터 참여, 서부지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립 시절부터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7년 미 법원 판결로 한국의 군사독재 정부 국영방송 이외 다른 시각을 시청자에게 허용하라는 자유한국방송 FKN(Free Korea Network) 대표로 1987년 4.13 호헌 조치, 6.29 선언, 대통령 직선제 선거 때까지 텔레비전 방송을 운영하기도 했다.

MBC 보도국 출신 언론인 김용현 한민족 평화연구소 소장은 "고 이선주 목사, 고 배연원 교수 등과 순수하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이끌어 나가셨다. 실제로 앞에 나타나지는 않으셨지만 강대양 씨의 그런 열정과 동력이 있어 사실상 인권문제연구소가 걸어왔고 1987년 첫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1994년에는 아태재단(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김대중 이사장으로부터 '특별 후원위원'으로 위촉받았다.

▲ 2021년 12월 12일 건제 강대양 (建弟 姜大洋)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서부지회 회장이 병원 퇴원후 가족묘지에서 어머니 강행옥여사 묘지에서 마지막 성묘를 했다. Photo © Hyungwon Kang
▲2007년 9월 김대중 전대통령의 마지막 미국방문때 워싱턴에서 조찬후 작별인사 나누는 김대통령과 강대양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서부지회 회장. Photo © Hyungwon Kang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고인을 동교동에 초대해 독대한 자리에서 "강대양 씨가 소개한 인재들은 나한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인은 야당 시절 김 전 대통령에게 박지원 현 국정원장과 고 신건(辛建) 전 국정원 원장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권노갑 전 의원은 미국 망명 시절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후 돌아가실 때까지 치과 주치의였던 동생 강대인 박사에게 북에 형님이 계시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을 못하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故 강대양, 가족과 하루 하루를 선물로

고인은 2013년 평양에서 앞서간 큰형 강대용(姜大勇) 씨와 2017년 사망한 동생 강대인(姜大仁) 씨에 이어 삼형제 중 마지막으로 타계했다.

둘째 아들 형원 씨는 부친이 5년 전 항암 치료를 하던 막내 동생 치과의사 강대인 부천 다니엘병원 이사장을 먼저 보낸 뒤 항암 치료를 마다하고 "가족들과 하루 하루를 선물로 받아들이며 이생을 마무리하셨다"고 전했다. 형원 씨는 한인 최초 풀리처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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