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재강국 되려면 10년은 돈·인력 쏟아부을 각오해야
◆ 매경 인터뷰 ◆
탄소섬유에서 전 세계 1위를 달리는 세계적 첨단 소재업체 도레이의 닛카쿠 아키히로 사장은 자사 경쟁력과 한국의 소재 산업에 전하는 조언을 이렇게 풀어냈다. 닛카쿠 사장은 1973년 도레이에 입사해 50여 년 한길을 걸어온 '소재 사업' 전문가다. 2010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으로 도레이를 이끌어 왔다. 소재 산업에 대한 조언 등을 듣기 위해 지난달 말 일본 도쿄 본사에서 닛카쿠 사장을 만났다.
닛카쿠 사장은 '소재 산업은 시간이 걸린다'는 표현으로 사업 특성을 전했다. 그는 "한국은 일본 등에서 부품·소재를 공급받아 (TV·스마트폰처럼) 조립하는 데 강점이 있고 이런 사업은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빨리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이 때문에 소재 기업 입장에서 한국 기업과 얘기해보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자릿수'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도레이와 같은 연구개발 문화가 단기 경영실적을 중시하는 미국식 경영에서는 허락되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예전에 미국의 유명 화학회사 최고경영진이 (도레이의 문화가) 부럽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닛카쿠 사장은 "도레이에서는 5년, 10년, 15년 뒤를 겨냥한 장래연구에 연구개발 투자비의 40%가 쓰인다"며 "보통 1~2년 뒤를 겨냥한 투자를 하는 곳이 많지 않으냐"고 말했다.
도레이의 연구개발 문화가 반영된 대표적인 제품이 탄소섬유다. 탄소섬유는 철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내구성 등이 뛰어나 항공기 기체에서 풍력발전기 날개, 테니스 라켓까지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닛카쿠 사장은 "탄소섬유 개발을 위한 연구를 시작한 게 쇼와 26년(1951년)께 인데, 첫 상품이 나온 것은 쇼와 46년(1971년)으로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개발 중에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결국 끈기 있게 개발해 냈다"고 소개했다. 도레이는 이후에도 탄소섬유 연구를 계속해 항공기 기체에 사용되도록 발전시켰고 지금은 세계 최대 탄소섬유 업체가 됐다. 최근에는 '탈탄소' 추세에 따라 풍력발전기 날개 등으로 사용이 늘어 도레이는 이와 관련한 생산능력 확대에 나서기도 했다.
도레이 주요 상품 중 하나인 역삼투압(RO)막도 장기 연구개발 결과물이다. 닛카쿠 사장은 "RO막은 1968년 연구를 시작해 1980년에 제품이 나왔다"고 소개했다.
최근 산업계 핵심 흐름 중 하나인 '탈탄소'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닛카쿠 사장에게 질문을 던지자 "이미 2010년에 장기비전으로 '그린이노베이션'을 선정해 대응해왔고 이제 세상이 쫓아오고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도레이 강점인 장기경영이 효과를 낸 것이다. 그린이노베이션은 사회 전체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공헌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닛카쿠 사장은 특히 혁신적 소재를 통한 온실가스 저감을 강조했다.
닛카쿠 사장은 "항공기에 도레이의 탄소섬유를 쓰면 무게를 줄여 연비를 20% 정도 개선할 수 있고 유니클로와 함께 개발한 '히트텍'을 통해 의류 보온성을 높여 난방온도를 낮추고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도레이 소재·제품을 통해 2020년 2억5000만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제품을 개발·확대하면 3억t을 줄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닛카쿠 사장은 "소재의 원료를 바이오화하는 게 중요하고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재활용 기술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닛카쿠 사장은 뛰어난 소재기업들을 갖고 있는 게 일본 경제의 강점이지만, 중국의 물량 공세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재를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는 화학섬유를 연간 100만t 이상을 만드는 기업이 여럿 존재할 정도"라며 "비용과 물량으로는 경쟁할 수 없고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새로운 소재,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런 새로운 제품으로 예를 든 게 히트텍이다. 그는 "유니클로와 오랜 시간 걸려 개발한 히트텍과 같은 제품은 다른 회사가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닛카쿠 사장은 미래를 예측해 혁신적 소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사람(인재)'이라고 여긴다. 일본 기업의 경영에서 최근 몇 년 새 큰 화두가 된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X)이나 인공지능(AI) 활용 등을 통해 연구개발·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지만 이전에 없던 혁신적인 소재는 역시 인재의 '창조적 능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닛카쿠 사장은 "기업은 사회적 공기(公器)이며 도레이는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인건비를 변동비로 생각하고 실적을 위해 삭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기업도 많지만, 도레이는 인건비를 고정비로 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용한 인재는 제대로 키워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고, 이 직원이 다시 또 다른 인재를 육성하는 과정을 통해 회사가 발전하고 사회적으로도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레이류(流)' 경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닛카쿠 사장은 코로나19가 소재 수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그는 "코로나19에 따른 '스테이홈'과 재택근무 등에 따라 섬유 수요가 줄었다"며 "탄소섬유는 항공편 축소에 따른 항공기 발주 감소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반면 원격근무 확산에 따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통신 관련 소재는 수요가 늘었다"며 "한동안 수요가 줄었던 스포츠 관련 소재에서는 골프·자전거 등 수요가 회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일 관계 악화는 정치 세계일 뿐이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필요한 관계이고 기업·경제의 협력 관계를 이미 형성해 놓았다."
닛카쿠 아키히로 도레이 사장이 최근 몇 년 새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한일 관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도레이는 1963년 한국나이롱(현 코오롱인더스트리)을 시작으로 삼성·LG그룹 등과 다양한 협력을 지속하며 한일 기업 협력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회사다. 닛카쿠 사장은 "일본 기업이 부품·소재를 공급하고, 한국 기업은 이를 조립해 판매하는 협력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면서 "정치적으로는 미묘한 관계가 있지만 우리는 이런 영향이 없도록 손을 맞잡고 잘해왔고 앞으로 그럴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 이웃인 한국과 관계는 중요하고 특히 경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닛카쿠 사장은 특히 "정치가들도 (일본) 첨단소재 거래처가 한국이라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닛카쿠 사장은 한국이 세계 1위를 달리는 스마트폰이나 TV 등이 '일본의 부품·소재와 한국의 조립'이 가져온 협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일 관계 악화는 정치 세계일 뿐이고 일본인은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느냐'는 표현으로 민간 협력 가능성을 언급했다. 닛카쿠 사장은 한일 관계 개선 방안을 묻자 '가까운 사이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나라끼리 교류할 때 서로 이것저것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점을 서로 이해하고 지키는 게 정치 세계에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도레이와 한국 기업 협업은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닛카쿠 사장은 "우리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전인 1963년 한국나이롱과 협력을 시작했고, 1976년에는 삼성(옛 제일모직)과 협업을 시작하는 등 한국의 훌륭한 파트너들과 함께해왔다"고 말했다.
도레이와 한국 기업 간 협력은 최근에도 눈에 띈다. 도레이는 작년 10월 LG화학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 핵심 부품인 분리막을 개발·생산하기 위해 헝가리에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여기서 생산된 분리막은 LG에너지솔루션의 폴란드 배터리 공장이나 유럽의 배터리 업체에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닛카쿠 사장은…
△1949년 일본 효고현 출생 △도쿄대 공학부 졸업, 도쿄대 대학원 수료 △1973년 도레이 입사 △2004년 엔지니어링 부문장, 상무 △2007년 생산본부장, 부사장 △2010년 대표이사 사장
[도쿄 = 김규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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