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애런 맥기, 2000년대 중반 수놓은 최고 빅맨

이재승 2022. 1. 1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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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12월호에 게재됐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KBL이 처음으로 외국 선수 영입을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으로 바꿨을 당시 많은 선수들이 국내 무대로 진입했다. 자밀 왓킨스(당시 TG삼보), 크리스 랭(당시 SK), 네이트 존슨(당시 오리온스), 올루미데 오예데지(당시 삼성)가 문을 두드렸다. 모두 각 팀의 주요 전력으로 자리함은 물론 수려한 기량으로 많은 농구팬들을 불러 모았다. 그 중에서 부산 KTF(현 수원 KT)에 둥지를 튼 애런 맥기도 빼놓을 수 없다. KTF에서 세 시즌을 뛰며 활약한 그는 이후 시간이 지나 안양 KGC인삼공사의 대체 외국 선수로 뛰기도 하는 등 프로농구와 인연이 적지 않았다.

전략적 선택이 돋보였던 대학시절과 NCAA 파이널포 진출
맥기는 일리노이주 아오로라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신시네티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시절 많이 뛰지 못했다. NCAA 신시네티 베어캐츠에는 맥기 외에도 걸출한 선수가 즐비했다. 당시 신시네티에는 NBA에 진출했던 케년 마틴(2000 NBA 드래프트 1순위)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대구 오리온스에서 뛰기도 했으며 스페인리그(ACB) FC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피트 마이클이 있었다. 마틴과 마이클이 주전으로 나섰던 만큼, 맥기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었다.


결국, 그는 전학을 택했다. 농구팀이 자리하고 있는 전문대학으로 향했다. NCAA 내에서 전학을 한다면 한 시즌을 나설 수 없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전학 후에 맥기는 곧바로 출장시간을 확보했고, 자신의 실력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빈세네스대학교에서 지난 1999-2000 시즌을 보냈다. 그는 정규시즌 평균 26.5점 9리바운드 1.8어시스트 1.6블록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확인했다. 토너먼트에서는 경기당 34.5점을 책임지면서 공격을 확실하게 이끌었다. 이에 힘입어 맥기는 NJCAA MVP와 퍼스트팀을 동시에 석권했다.
 

이후 그는 다시 본 무대로 향했다. NCAA 오클라호마 수너스로 학교를 옮겼다. 오클라호마에서 그는 주전 센터로 자리를 잡았다. 연차와 실력이 고루 찼기 때문. 그는 평균 16점 7.7리바운드를 책임지며 주요 전력으로 역할을 했다. 지난 2000-2001 시즌에는 빅12컨퍼런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역 우승을 차지하며 NCAA 토너먼트 전망을 밝혔다. 그러나 첫 관문에서 시드가 낮은 인디애나스테이트 시카모어에 패하면서 첫 관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4학년인 지난 2001-2002 시즌에 파이널포에 진출했다. 오클라호마의 최근 파이널포 진출은 2016년에 달성한 바 있다. 2016년에 앞서 마지막에 파이널포에 오른 것은 2002년으로 무려 14년 만이다. 당연히 맥기가 돋보였으며, 이로 인해 그도 많은 농구팬에게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토너먼트에서 그의 활약은 돋보였다. 토너먼트 5경기에서 그는 경기당 21.8점 7.2리바운드를 올리며 맹활약했다. 토너먼트 첫 관문에서는 26점 12리바운드를 책임지며 팀의 2라운드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이널포로 향하는 동안 이어 맥기는 2라운드에서 25점, 3라운드에서 21점을 책임졌다. 3라운드에서는 NCAA 명문 중 하나인 애리조나 와일드캐츠를 꺾었다. 4라운드에서도 15점을 올리면서 오클라호마가 파이널포에 오르는데 가히 혁혁한 공을 세웠다. 파이널포 첫 경기에서는 무려 22점 8리바운드로 골밑을 휘어잡았다. 당시 상대는 인디애나 후지어스로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맥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오클라호마는 인디애나를 넘지 못했다.
 

4학년이었던 그는 정규시즌과 토너먼트를 합쳐 무려 13번의 더블더블을 작성했으며, 이는 당시 NCAA를 누빈 선수 중 2위에 해당이 됐다. 가장 많은 더블더블을 작성한 이는 드류 구든(NBA 진출)이었을 정도로 맥기의 존재감은 당시 대학 선수 중 돋보였다. 수준급 유망주들은 곧바로 NBA로 향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미국에 수많은 대학교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맥기는 전미 대학 선수 중 단연 밀리지 않는 기량을 갖춘 것은 분명했다. 해당 시즌 그는 오클라호마가 속한 컨퍼런스에서 득점 6위, 리바운드 5위에 올랐을 정도로 대단했다.

대학 졸업 이후 어려웠던 NBA 도전과 프로 진출
졸업 후 그는 NBA 진출을 시도했다. 프리드래프트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최우수선수에 선정이 됐다. 그러나 대학 시절 센터로 나섰던 그는 NBA에서 뛰기 신장이 작았다. 신발 착용 후 신장이 203cm로 크지 않았기 때문. 당시에도 언더사이즈 빅맨이 없진 않았으나 NBA에서 생존을 도모하긴 쉽지 않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았으며, 끝내 지난 2002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다. 2002 드래프트에서는 야오밍(1순위), 아마레 스타더마이어(9순위), 캐런 버틀러(10순위), 카를로스 부저(35순위), 루이스 스콜라(56순위)가 호명이 됐으나 맥기가 부름을 받긴 어려웠다. 후에 KBL에 진출했던 샘 클렌시(45순위)도 2라운드를 통해 뽑혔으나 맥기는 살아남지 못했다.
 

맥기는 국외로 눈을 돌려야 했다. 이탈리아리그 1부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시즌 중에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ACB리그 2부의 칸타브리아 발론체스토에서 뛰었다. 지난 2003-2004 시즌 발론체스토 그라나다는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1부로 승격했다. 이 때 KTF의 추일승 감독의 눈에 띄었다. KBL은 지난 2003-2004 시즌을 끝으로 외국 선수 선발을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으로 바꿨기 때문. 대신 지나친 지출을 경계하기 위해 리그 제한을 걸었다. 맥기는 팀을 1부로 이끌었으나 2003-2004 시즌을 2부에서 보냈기에 국내 무대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추 감독은 맥기를 외국 선수로 불러들이면서 KTF의 전력을 다졌다.

매직윙스와 계약하며 KBL로 향한 맥기
맥기는 KBL 진출과 함께 팀을 확실하게 주도했다. 게이브 미나케와 함께 외국 선수로 나서면서 KTF의 전력의 중심에 섰다. 맥기와 미나케와 상호 간 내외곽을 넘나들며 공격을 이끌었고, 현주엽은 포인트포워드로 변신해 이들과 조합을 찾았다. 추 감독은 부임 2년 만에 팀을 확실하게 상위권으로 견인했다. ‘맥기-미나케-현주엽’이 프런트코트를 확실하게 책임졌다. 맥기와 미나케가 상대 선수와의 매치업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고, 현주엽이 스몰포워드로 나서면서 오히려 높이가 크게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현주엽이 토종 선수와의 매치업에서 우위를 점했고, 그의 패스를 통해 맥기와 미나케가 외곽에서도 순조롭게 득점 사냥을 나설 수 있었다.
 

당시 리그에는 많은 팀이 골밑을 장악할 수 있는 확실한 센터와 공격력을 잘 갖추고 있는 포워드를 선호했다. 그러나 KTF만이 유일하게 센터와 포워드를 두루 넘나들 수 있는 맥기와 미나케를 동시에 영입하면서 전력을 다졌다. 여느 팀이 확실한 역할 배분에 나선 것과 달리 추 감독은 장신 선수를 고루 활용하는 방안을 내세웠고, 이를 통해 전력을 확실하게 다졌다. 무엇보다, 맥기와 미나케의 조합은 우려와 달리 상상을 초월했다. 미나케가 평균 24.7점 8.1리바운드, 맥기가 경기당 22.7점 12.9리바운드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둘 다 빅맨임에도 외곽슛까지 갖추고 있어 공간 창출에서도 상당히 용이했다. 맥기는 당시 평균 리바운드 1위, 미나케는 평균 득점 4위에 올랐을 정도로 아주 출중한 기량을 자랑했다.
 

맥기와 미나케가 팀 득점과 리바운드를 절반 이상 책임지면서 국내 선수 구성이 돋보이지 않았던 KTF가 꾸준히 리그 상위권에 자리할 수 있었다. 지난 2004-2005 시즌에는 원주 동부(현 DB)와 전주 KCC가 단연 돋보였던 가운데 KTF에도 이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맥기와 미나케가 공수 양면에서 존재감이 단연 돋보이면서 현주엽이 자신의 장기인 패싱센스를 십분 활용했다. 현주엽은 당시 평균 14.2점 3.6리바운드 7.8어시스트를 올리면서 평균 어시스트 순위에서도 수위권에 올랐을 정도로 남다른 감각을 자랑했다. 그는 평균 어시스트 2위에 올랐다. 포워드인 그가 어시스트 순위에서 5위 이내 들어간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 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맥기가 리바운드, 미나케가 득점, 현주엽이 어시스트를 확실하게 책임지면서도 서로가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하면서 KTF가 전성시기를 열어젖힐 수 있었다.
 

당시 리그에는 흥행과 변수가 두루 자리하고 있었다. 시즌 막판에 안양 SBS(현 KGC)가 외국 선수를 전격 교체했다. ‘단선생’ 단테 존스가 가세하면서 리그 판도과 급변하기 시작했다. 관중몰이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을 정도. SBS는 일약 순위를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그 사이 KTF는 시즌 내 선전하고도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KTF는 리그 4위로 정규시즌을 마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당시 TG삼보의 높이 구성이 돋보였던 만큼, KTF로서는 3위를 차지해 시드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SBS의 상승세와 맞물리면서 KTF도 순위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KTF는 플레이오프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서울 삼성과 격돌했다. 시즌 내 보인 경기력이었다면 KTF가 삼성을 따돌리기 충분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미나케가 발목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전력의 중추인 미나케가 빠지면서 KTF는 한 쪽 날개를 잃고 말았다. 맥기와 현주엽이 분전했으나 높이의 삼성을 막기 쉽지 않았다. 결국,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하고 내리 2패를 당하면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부산의 대들보 & 리그 최고 선수
이듬해에도 맥기의 활약은 여전했고, 대단했다. 그러나 KTF의 전력은 약해졌다. 시즌 후 현주엽이 창원 LG로 이적했으며, 미나케와는 재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미나케는 이전부터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분위기를 다지는데 다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에 KTF는 미나케와 재계약을 대신해 새로운 선수와 계약해하기로 했다. 현주엽이 이적하면서 보상선수로 송영진을 데려왔으나 당장 전력에 도움이 되기에 모자랐다. 미나케와 현주엽이 마크 샐리어스와 송영진으로 바뀌면서 전반적인 무게감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맥기는 어김없이 제 몫을 해냈다.
 

그러나 KTF는 외국 선수 교체를 통해 반전을 마련했다. 부진하던 샐리어스를 나이젤 딕슨으로 바꾼 것. 딕슨이 안쪽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면서 맥기가 포워드로 뛰면서 높이가 한 층 더 보강이 됐다. 딕슨이 높이에서 돋보이진 않았으나 남다른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는 만큼, 안쪽에서 존재감은 단연 발군이었다. 이에 맥기가 안팎을 넘나들며 공격에 나설 수 있었고, KTF는 이적한 신기성과 함께 새로운 전력을 꾸렸다. 시즌 첫 12경기에서 단 4승을 신고하는데 그쳤으나 딕슨 가세 이후 여느 강호에 밀리지 않으면서 상승세를 이어갔다.
 

시즌 중에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당시 드래프트는 시즌 중에 개최됐다. 신인 최대어인 방성윤의 참가로 많은 이목을 끌어 모았다. KTF는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손에 넣었으나 방성윤이 국내 진출보다 미국 도전에 나서길 바랐던 만큼, 지명을 두고 고심했다. 결국, KTF는 서울 SK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변화를 가하기로 했다. KTF는 방성윤의 지명권리, 정략영, 김기만을 보냈고, SK로부터 조상현, 황진원, 이한권을 받기로 하면서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KTF는 방성윤을 매물로 취약했던 선수층을 보강했다. ‘신기성-황진원-조상현’으로 이어지는 토종 선수 라인업을 구축했다. 여기에 맥기와 딕슨이 더해지면서 힘을 내기 충분한 선수 구성을 마쳤다.
 

맥기는 누구보다 팀의 대들보였다. 지난 2005-2006 시즌 외국 선수 교체와 국내 선수 트레이드로 변화가 적지 않은 와중에도 누구보다 꾸준했다. 그는 평균 22.9점 9.8리바운드로 변함없이 중심을 잘 잡았다. KTF는 플레이오프에 올라갈 수 있었다. 선수 중 단연 맥기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KTF는 이번에도 플레이오프 첫 관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KCC에 내리 패하면서 창단 이후 플레이오프 첫 승 수확은 다시 멀어졌다. KTF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1승도 따내지 못했으며, KTF로 인수되기 전까지 합치면 플레이오프에서 7연패를 끊어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딕슨의 부상 대체로 들어온 외국 선수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KTF는 당연히 맥기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새로운 외국 선수로 스페인을 누볐던 필립 리치를 데려왔다. 리치도 내외곽을 넘나들 수 있는 빅맨으로 흡사 지난 2004-2005 시즌 ‘맥기-미나케’와 엇비슷한 선수 구성과 조합을 마쳤다. 여기에 지난 시즌 중에 가세한 선수들도 오프시즌을 거치면서 완연하게 녹아들었다. 맥기와 리치가 득점, 리바운드를 확실하게 책임지며 중심을 잘 잡았고, 신기성을 경기를 잘 풀어나갔다. 이때는 얼마 전 은퇴한 조성민이 프로에 진출한 첫 시즌이기도 했다. KTF는 리그 3위에 오르며, 당시 구단 역사상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2010-2011 시즌 리그 1위).
 

부상이 없는 것도 주효했다. 지난 2005년에 미나케, 2006년에 딕슨까지 핵심 전력이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연거푸 다친 것이 아주 뼈아팠다. 그러나 2007년에는 부상이 없었다. KTF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비로소 이기기 시작했다. 맥기와 리치가 안팎을 넘나들며 어김없이 이름값을 해냈고, 토종 선수들의 활약까지 잘 어우러졌다. KTF는 1라운드에서 존스의 안양 KT&G(전 SBS, 현 KGC)를 따돌렸다. 맥기는 존스와 시리즈 내내 으르렁거렸으며, 거친 몸싸움이 야기되는 등 신경전이 엄청났다. KTF는 2연승으로 첫 관문을 통과했다. 준결승에서는 LG와 상대했다. LG는 찰스 민렌드와 현주엽을 중심으로 리그 2위에 오른 강호였다. 접전 끝에 KTF는 LG를 따돌렸다. 준결승 4차전에서 LG의 퍼비스 파스코가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폭행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KTF가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맥기는 이 때 심판 판정에 지나친 불만을 품고 있었다. 3차전 도중 판정에 흥분했고, 불필요한 욕설로 인해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KTF는 간판인 맥기 없이 4차전에 나섰다. 그러나 파스코의 이탈로 KTF가 오히려 매치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고, KTF가 가까스로 시리즈를 접수하며 창단 첫 결승에 진출했다(현재까지 유일한 결승 진출). 결승에서는 크리스 윌리엄스의 울산 모비스와 마주했다. 양 팀은 최종전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모비스가 부산에서 울산으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007년 결승은 볼거리가 많았다. 부산과 울산을 오가며 열린 첫 결승이었으며, 양동근(모비스)과 신기성의 매치업에 외국 선수 대결까지 시리즈 내내 경기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KTF와 맥기는 아쉽게 우승을 목전에 두고 정상에 서지 못했다.

국내 무대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KBL은 시즌 후 외국 선수 선발 규정을 다시 종전으로 돌려놓기로 했다. 이에 자유계약으로 뛰던 선수들과 함께할 수 없게 됐다. 사실상 KTF의 프랜차이즈스타였던 맥기도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곳으로 향해야 했다. 맥기 외에도 존스, 윌리엄스 등도 모두 국내를 떠나야 했다.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했으며, 중국으로 향했다. 신장 플라잉타이거스에서는 TG(현 DB)에서 뛰며 창단 첫 우승을 안긴 ‘2002 결승 MVP’ 데이비드 잭슨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이후 그는 유럽으로 향하면서 변함없는 전성기를 보낸다. 이스라엘에서도 꾸준한 실력을 자랑했다.
 

이후 30대에 들어서며 그도 서서히 경쟁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유럽 상위리그에서 뛰긴 어려웠다. 우크라이나를 거친 그는 러시아 2부 리그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국내에서 뛸 때처럼 한 팀에서 간판급으로 오랫동안 뛰기에는 다소 아쉬웠다. KBL에 꾸준히 뛰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겠으나 유럽에서는 상대적인 부분이 훨씬 큰 만큼, 한 곳에서 장기간 머무르기 쉽지 않았다. 30대 중반이 된 이후에는 방출을 되기도 하는 등 맥기도 더는 이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다시 국내 무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지난 2014-2015 시즌 도중 안양 KGC인삼공사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KGC가 맥기를 대체 선수로 불러들이면서 전력 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KGC는 리온 윌리엄스와 C.J. 레슬리를 외국 선수로 두고 있었다. 맥기가 이전에 뛸 때는 ‘2인 보유-2인 출전’이었으나 시간이 많이 흐른 이후 KBL은 ‘2인 보유-1인 출전’을 유지했다. 이 때 다시 한국에 상륙했다. KGC도 오세근이 온전치 않았던 만큼, 레슬리를 교체하기로 한 것. 맥기가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맥기는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국 진출 전에 방출을 경험하는가 하면 수준급 리그가 아닌 중하위권 무대를 전전했기 때문. 결정적으로 30대 중반이었던 만큼, 전반적인 활동량이나 움직임은 이전과 현격하게 달랐다. 수비에서 상대를 놓치기도 하는 등 윌리엄스의 뒤를 좀처럼 받치지 못했다. KTF에서 뛸 당시 빅맨임에도 안정적인 3점슛까지 갖추고 있는 그였으나 KGC에서 뛸 때는 달랐다. 결국, KGC는 다시 외국 선수를 바꾸기로 했다. 이후 그는 푸에르토리코와 멕시코를 거쳤으며, 지난 2016년에 농구공을 내려 놓았다.
 

사진_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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