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사찰] 술을 한 방울도 못 해서 왕이 되지 못한 효령대군

글 이재진 편집장 사진 이신영 기자 2022. 1. 1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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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은 셋째인 충녕대군 만큼이나 학문적 깊이와 인격을 지녀 국왕이 될 그릇이었다.

그러나 효령대군에게는 결정적 결함이 있었으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던 것이다.

일찌감치 눈 밖에 난 장남 양녕은 차치하고서라도 태종이 차남 효령마저 제치고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은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이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잘 마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효령대군을 포기하고 충녕에게 세자의 지위를 물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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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암과 효령대군
인품·학문 갖췄지만 세종에 양보..국가원로 예우 받으며 장수, 평안한 일생
연주암 효령각에 있는 효령대군 영정. 조선 초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유물이다.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은 셋째인 충녕대군 만큼이나 학문적 깊이와 인격을 지녀 국왕이 될 그릇이었다. 그러나 효령대군에게는 결정적 결함이 있었으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던 것이다.
일찌감치 눈 밖에 난 장남 양녕은 차치하고서라도 태종이 차남 효령마저 제치고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은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이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잘 마시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마다 몇 차례씩 조선에 찾아오는 명나라 사신들 접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 왕들과 취하도록 마시며 조선의 왕을 시험하곤 했다. 그러니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하는 효령이 태종 뒤를 잇게 된다면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효령대군을 포기하고 충녕에게 세자의 지위를 물려준 것이다. 이는 <태종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두주불사가 미덕은 아니더라도 제왕의 필요조건이었던 셈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결정에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인 충녕대군이 국왕이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격려했다. 진정한 대인의 풍모다. 효령의 결단과 지원이 없었다면 성군 세종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왕위를 되찾겠다는 야욕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어 세종을 흔들었다면 조선 문화의 황금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효령대군은 단순히 왕의 지위를 동생에게 넘긴 존재로만 기억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조선 초기 불교를 진흥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1429년(세종 11) 관악사를 건립하고, 월출산 무위사의 중창을 지도하고, 만덕산 백련사 중창의 시주가 되었다.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을 중건한 이도 효령대군이었다. 지금도 관악산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봉안한 효령각이 있다.
효령대군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조선 임금 여섯 명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과 국가 원로로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평안한 일생을 보내다가 1486년(성종 17) 5월 11일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조선 역대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점을 고려하면 효령대군은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권력에의 미련을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술을 멀리하며 전국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건강을 챙긴 덕분이 아니었을까? 연주대에서 방배동 방향을 바라보면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인 청권사가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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