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오르며 만난 내 안의 시시포스

한겨레 2022. 1. 1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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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신화적 영웅의 원형을 찾아서

※ 다시 연재를 이어갑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비움과 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양해를 구하며,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더 즐겁게, 힘차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영웅

창조신화와 자연신화에 이은 치유적 신화읽기 세번째 화두는 영웅신화다. 영웅은 신화론의 빼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신화를 말할 때 신(神)보다 영웅을 더 크게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제우스나 아폴론보다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아킬레우스를 먼저 떠올리는 식이다. 한국신화에서도 천신에 해당하는 해모수보다 영웅적 성격을 지니는 주몽이 더 큰 주인공 구실을 한다.

세계 신화에서 영웅의 위치는 크고도 특별하다. 영웅은 신화에 역동성을 부여하면서 강한 파토스를 유발한다. 만약 신화에 영웅들이 없다면 비바람이 없는 땅이나 파도 없는 바다처럼 될 것이다. 강렬한 신념과 의지, 불굴의 용기와 도전으로 채색된 영웅의 서사는 신화에 힘찬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신화에서 신(神)과 영웅(英雄)의 경계는 사실 그리 뚜렷치 않다. ‘영웅신’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신인 동시에 영웅으로 다가오는 존재들이 많다. 영웅적 면모가 짙은 신들이 있고,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 영웅들이 있다. 북유럽 신화 같은 경우 대다수 주인공이 영웅신 속성을 지니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굳이 신과 영웅을 구별해서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신과 영웅은 본질적 정체성과 속성 면에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가이아와 제우스를, 또는 라(Ra)와 티아마트, 비슈누, 옥황상제 등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 길가메시와 람세스, 라마찬드라와 후예(后羿) 등을 영웅으로 부르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질적 차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신(神)은 개념 범위가 넓고 가변성이 크지만, 그 본래적 속성을 자연성과 영원성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은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존재한다. 신에게는 구애받음이 없다. 그 원형적 표상은 대자연에서 볼 수 있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불과 물과 바람…… 늘 그렇게 머물러 움직이는 억겁의 존재들의 다른 이름이 곧 신이니, 일컬어 천신과 지신, 산신과 용신 등이다. 우라노스와 제우스, 환인과 천지왕 등은 명백히 하늘의 표상이며 아폴론이나 해모수는 태양의 현현이다. 대지의 신 가이아나 밤의 여신 닉스 등도 명확한 자연신이다. 아이테르와 스틱스, 타나토스 등 닉스가 낳았다는 수많은 신들도. 태초의 혼돈을 헤쳐낸 창조신들은 자연의 시원적 창조력을 표상하는 존재로 보면 틀림없다.

이에 비하면 영웅은 명백히 인간의 속성을 지닌다. 자연이라는 크나큰 신적 세계 앞에 선 인간. 인간에게 그 세계는 만만치 않다. 작열하는 태양과 갈라지는 땅, 몰아치는 폭풍우와 홍수, 불시에 찾아오는 질병과 죽음…… 피할 수 없이 거기 휘둘리며 신음하는 것이, 또는 그 절대적 힘에 순종하면서 적응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적 숙명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속절없이 휘둘리거나 순종하다가 떠나는 것은 아니다. 거친 세계에 결연히 맞서서 틀을 바꾸고자 한 예외적 인간들이 있으니,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영웅이라고 한다.

형벌과 도전 사이, 시시포스의 서사

예외적 인간, 특별한 인간으로서 영웅을 영웅답게 하는 기본 자질은 무엇일까? 절륜한 힘이나 용맹, 고도의 지혜 등을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핵심이 불굴의 투지와 도전성에 있다고 믿는다. 불가능으로 보이는 과업에 결연히 나서서 온몸으로 부딪쳐 싸우는 존재가 영웅이다. 그 싸움의 대상에는 당연히 신(神)이 포함된다. 아니, 신적 질서야말로 영웅이 부딪쳐 싸우는 핵심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적 섭리에 대해 영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꾸려 한다. 사례 하나. 인간의 죽음. 최초의 영웅 길가메시는 죽음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여정에 몸을 던진다. 사례 둘. 하늘에 여러 개 떠 있는 태양. 후예와 메르겡은, 그리고 대별왕 소별왕은 활시위를 당겨서 해를 쏘아 떨어뜨린다. 그렇게 신화 속 영웅은 세계의 틀을 바꾼다.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과업에 도전해서 그것을 이루어낸 영웅들은 그 자체 신의 반열에 오르곤 한다. 길가메시와 후예, 대별왕 소별왕 등은 영웅인 동시에 신이다. 태초의 거친 자연을 상징하는 거인들을 제어해서 세계를 재편한 오딘과 토르 등도. 인신(人神)의 범위가 유난히 넓은 한국신화에서는 최영과 남이, 임경업 같은 역사적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어떤가 하면, 모든 영웅들이 과업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최영이나 남이, 임경업만 하더라도 실제 역사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 인물에 가깝다. 이들이 신으로 모셔지는 데는 역설적 진실이 담겨 있다. 인간의 태생적 미력함에 대한 인식이며, 그 미력함을 불가능한 싸움으로 펼쳐낸 투쟁의 서사에 대한 공명이다. 살펴보면 신화 속 영웅은 대부분 불완전한 존재들이며, 그럼으로 해서 더 강한 파토스를 발현한다. 결정적 약점을 지녔던 영웅 아킬레우스나 지그프리드 등이 강렬한 여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완전함 때문에 더 먹먹하고 애틋한 인간적 대변자가 되어 ‘나의 서사’로 각인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과업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표상하는 신화적 인물로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시지프스)를 들 수 있다. 어둠의 세상인 저승에서 가파른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올리고 또 올리는 사람. 시시포스는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일컬어지거니와, 나는 그에게서 인간적 영웅의 원형을 본다. 이야기는 높은 언덕 위로 돌을 굴리는 그의 행위를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말하지만, 그치지 않고 돌을 굴려 올리는 주체는 시시포스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 아닐까? 신적 체계에 맞선 불굴의 도전!

시시포스는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남을 속이기 좋아해서 여행자들을 해쳤다고도 한다. 주목할 것은 그가 신적 질서를 따르지 않고 그에 맞섰다는 사실이다. 그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찾아오자 오히려 그를 잡아서 족쇄를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이 아무도 죽지 않았다 하니 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전쟁신 아레스에 의해 저승으로 붙잡혀간 시시포스는 다시 꾀를 내서 되살아난다.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해놓고는, 저승신 하데스에게 아내 설득 명목으로 이승행을 허락받은 뒤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신들에게 정면으로 맞선 행보다. 신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말성꾼이었겠으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국 헤르메스에 의해 저승으로 되돌려진 시시포스에게 주어진 것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그는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는데, 정상에 올리면 돌이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지금도 끝없이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올리고 있다.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먹히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과 더불어서, 신적 질서를 거역하는 일의 엄중함을 단적으로 표상하는 형상이다. 인간으로서 감히 신에 맞선다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시시포스의 서사는 얼핏 영웅성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그를 영웅이라 일컫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영웅의 원형적 면모를 본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그가 바위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거듭 바위를 굴려 올리는 모습을 부조리에 맞선 ‘인간승리’로 평가했거니와, 그 해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안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행하는 것. 그렇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고 영웅인 것 아닐까?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려올리는 일을 ‘저승’에서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잠깐 덧붙인다. 그 저승은 곧 ‘지옥’일 것이다. 거칠고 험한 어둠의 세상. 그 기운에 눌려 무력하게 잦아들 때 그곳은 영원한 지옥이 된다. 하지만 일어나서 움직일 때, 그곳은 더이상 지옥이 아니다. 하나의 삶의 장이 된다. 멀리 저세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는 이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한라산을 거듭 오르며 시시포스를 만나다.

영웅신화의 원형에 대한 글을 시시포스 이야기로 풀어낼 계획은 전혀 없었다. 길가메시나 프로메테우스, 헤라클레스, 소별왕 대별왕 등에 대한 내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시포스가 찾아온 것은 일종의 우연이었다. 지친 심신을 추스르기 위한 나홀로 제주도 여행에서 한라산을 오르던 중에 문득 그가 마음속에 스며 들어왔다. ‘나의 영웅’으로서.

원래의 여행 계획에 한라산 등반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올레길을 축으로 해서 제주 바닷가와 들녘을 마음껏 거닌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며칠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맑은 날, 문득 멀리 한라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쌓인 하얀 봉우리를 보는 순간 거기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간 여러번 제주도에 왔음에도 한라산에 오른 적은 없었다. 산보다 들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이번에 한번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는 거야!’ 그렇게 결심하고 바로 다음날 결행했다. 탐방로 예약이 차있었으나 계속 확인하다 보니 빈 자리가 났다. 하지만 등산 준비가 문제였다. 당장 아이젠을 구할 곳이 없었다. 아침 일찍 버스를 갈아타고 성판악 탐방로로 갔으나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등산로는 입구부터 눈이 가득했다. 급히 관음사 쪽으로 가서 휴게소에서 아이젠을 산 뒤 제한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헉헉대면서 겨우겨우 정상에 올랐으나 백록담은 볼 수 없었다. 짙은 구름뿐이었다.

산에서 한참 걸어 내려오는 중에 시시포스가 찾아왔다. 배낭을 매고서 힘들여 산정을 오른 나. 결국 다시 내려가게 돼있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일이 시시포스의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내내 머물 수 없는 것이, 내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럼에도 다시 또 오르기를 멈추지 않을 때, 그러한 오르내림을, 아니 ‘내리오름’을 그치지 않고 계속할 때 우리의 삶은 ‘시시포스의 서사’가 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다시 한라산에 올랐다. 하루 건너서. 또 이틀 건너서. 시시포스가 되어 세 번 오른 한라산 백록담 길은 같지 않았다. 똑같은 오르내림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였고, 다른 ‘나’였다. 날씨가 달랐고 눈이 쌓인 정도가 달랐다. 땅과 나무 속의 생명적 움직임도 달랐으리라. 한 걸음씩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테니까. ‘나’로 말하면, 몸과 마음에 큰 다름이 있었다. 첫번째는 힘겨워 헉헉댔으나 두번째는 견딜 만했고, 세번째는 무난했다. 마음에 편안한 여유가 생겨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볼 정도로. 뜻밖에도, 세번째 등반에서 들른 사라오름의 풍광이 백록담보다 절경이었다.

시시포스가 되어 한라산을 오르면서 그가 산으로 바위를 굴려올리는 일은 형벌이 아님을 몸으로 깨우쳤다. 첫날 너무나 가파르던 길은 다시 오르니 그렇지 않았다. 무겁고 부담스럽던 배낭도 점점 나와 한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다시 내려올 길이지만 무슨 상관이랴. 내려옴이 있기에 올라감도 있는 것. 그러한 오르내림을, 내리오름을 기꺼이 감수하리라는 마음이 밀려왔다. 시시포스의 거듭된 오름. 그것은 똑같은 오름이 아니다. 그는 계속 새로운 발견과 함께 새로운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일부러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는 것일지도! 신들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시포스가 나의 자기서사로 찾아들면서 나의 지난 일상이 재구성되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반복되는 과업들.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당연히 그리할 삶이었다. 축복이었다. 이렇게 살아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얼마나 벅찬 일인지! 주어진 모든 일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나는 다시 이렇게 글을 쓴다. 멀리 제주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 바깥으로 나가면 한라산 봉우리도 보이려나.

다시 움직이는 사람, 그대가 바로 영웅이다

세번째로 한라산을 오르던 날, 시시포스에 대해 생각하던 중에 문득 웹문학 속의 ‘회귀자’들이 떠올랐다.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과업을 계속하는 인물들. ‘전독시’(전지적 독자 시점)의 유중혁 외에도 웹소설과 웹툰에는 수많은 회귀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나의 판타지적인 장치로 생각했던 그 서사는, 사실은 신화적인 것이었다. 그 회귀자들이 곧 시시포스라는 뜻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상태에서 산정을 향해 바위을 굴리고 있는 것이므로. 카뮈가 말한바 ‘인간승리’다. 그러므로 주인공!

회귀자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벗어나 주변을 보니 수많은 시시포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낭을 짊어지고 설산을 오르고 있는 수많은 남녀노소들. 그들 모두 내려올 것을 알면서 힘들여 언덕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경사진 눈길을 뛰듯이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힘에 부쳐 쓰러질 듯 헉헉대는 사람들도 많았다. 누가 이를 두고 ‘형벌’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들 모두 이렇게 벅차게 살아있는 것임을!

어찌 산을 오르는 일뿐일까. 우리의 모든 일상이 마찬가지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과가 반복되는 날들. 거기 무너져 잦아들 때 세상은 지옥이고 존재는 형벌이 된다. 하지만 기꺼이 회귀자가 되어 다시 움직일 때, 시시포스가 되어 돌을 굴려올릴 때 세상은 ‘삶’의 터전이 되고 우리는 주인공이 된다. 그렇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사람들. 캠벨이 인용한 우파니샤드의 표현을 빌리면, ‘네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바로 영웅이다.

한 가지 삽화를 덧붙이자면, 숙소에 돌아와 땀에 젖은 옷들을 손으로 비벼 빠는 중에 ‘가사(家事)’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가득 쌓인 빨랫감을 물대야 넣어서 한참을 발로 밟고 비벼 빤 뒤 다듬이질을 하던 어머니…… 한없이 반복되던 그 일상의 무게감이 눈물로 다가왔다. 바리데기가 얼음물에서 검은 옷 희게 빨고 흰 옷을 검게 빨던 장면의 신화적 의미도. 어디 꼭 과거의 일일까. 밥 짓고 청소하고 아이 챙기고…… 표나지 않는 일상사를 묵묵히 이어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히 경배를 보낸다. 그 한 사람인 아내에게 오랜 만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원한 나의 여신님, 감사합니다!”

앞에서 신의 길과 영웅의 길, 또는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다고 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자체 자연의 일부이고 신의 현현이다. 굴하지 않고 부딪쳐 싸우는 일은 인간의 자연적 속성이다. 그 자연성을 오롯이 체화할 때, 인간은 영원성을 얻는다. 일컬어 신성(神性).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영원히 계속하는 시시포스는 그 자체 하나의 자연이고 신이다. 여기 있는 나, 그리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걸림 많은 세상 속 나아감을 그치지 않는 사람, 그대가 곧 영웅이고 신이다. 그렇게 써나가는 갸륵한 삶의 서사, 아름다운 신화가 될 것이다.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치료학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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