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없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첫사랑의 기억

한겨레 2022. 1.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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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미니시리즈 '그 해 우리는'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한 장면. SBS 제공

<에스비에스>(SBS) 월화 미니시리즈 <그 해 우리는>(이하 ‘그 해’)은 현실 로맨스로 분류되는 드라마다. 여기에는 불사의 존재도, 남다른 능력의 수사관도, 재벌 실장님도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고등학생에서 평범한 사회인이 되어버린 이들의 첫사랑과 실연, 재회를 다룬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랑은 흔한 현실이 아니란 측면에서 작은 판타지이다. ‘그 해’에는 “자신의 성향과 반대인 사람에게 끌린다”는 전통적인 학원 로맨스의 클리셰를 포함해서,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첫사랑에 대한 환상도 들어 있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한 장면. SBS 제공

전교 1등과 전교 꼴등의 ‘한달 살기’라는 콘셉트로 기획된 다큐멘터리에서 연수와 웅은 서로 아옹다옹 다투다 사귀게 된다. 10년 후의 두 사람을 다시 묶어준 것도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쓴 의미는 명백하다. 속마음을 직접적 내레이션으로 들을 수 있는 동시에 서사에 사실감을 부여한다. 한편, 화면은 초반부터 빈티지 필터를 써서 에스엔에스(SNS)의 사진처럼 화사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해’는 처음부터 사실처럼 보이는 환상을 추구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최웅과 국연수 또한 편안한 아름다움이 장점인 최우식, 김다미 배우가 연기한다. 각각 <기생충>과 <이태원 클라쓰>로 글로벌 시청자를 얻은 스타 배우지만 둘 다 이 드라마의 일상성과 역설적인 시너지를 낸다. “자고 갈래?”라고 말해도 작업 멘트처럼 보이지 않는 나른한 담백함이 웅에게 있고, “내가 너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연수에게는 현실의 진정성이 있다.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실은 모두 정갈한 프레임 안에 담겨 있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한 장면. SBS 제공

깨끗한 현실이라는 이상은 이 드라마의 핵심인 첫사랑의 감정에도 적용된다. 헤어진 이후 5년, 실제로는 다시 만나 서로 부끄럽지 않기가 쉽지 않다. 재회한 첫사랑이 다단계나 보험, 신흥 종교를 권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스물아홉의 웅은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이고, 연수도 경제적으로 무력하기만 했던 상태를 벗어났다.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한결같다. 10년 동안 둘밖에 없던 첫사랑이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니지만, 있었을 법한 그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처음 사랑했던 감정만은 실패가 아니고 그 순간만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보는 이들은 “지긋지긋하지만, 또 너야”라는 웅의 대사에서 몸서리치게 피곤하면서도 매번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연애를 떠올린다. 연수가 할머니에게 “내가 버렸어, 웅이, (…) 근데 할머니, 나 아직도 최웅 좋아해”라고 고백하며 울먹일 때, 언젠가 지나간 이별을 후회하기도 한다. 웅의 절친한 친구이자 다큐멘터리 피디인 지웅이 연수를 바라보는 눈길을 보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짝사랑을 기억한다. 이처럼 ‘그 해’는 보편의 연애 감정을 되살린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한 장면. SBS 제공

현실 로맨스로 ‘그 해’의 강점은 현시대의 자의식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가진 게 없어서 첫사랑인 웅을 소중히 여겼던 연수와 딱히 가지고 싶은 게 없지만 연수만은 간절히 원했던 웅은 경제적 격차로 인한 현실감각의 차이로 어긋난다. 과거의 드라마 서사에서는 계급 차이를 지속적으로 타인이 인식시킨다. 부유한 쪽의 가족이 와서 돈 봉투를 던진다거나 갑작스러운 해외 유학으로 헤어지는 방식이다. ‘그 해’에서는 타인의 방해가 아니라 떨칠 수 없는 경제적 자의식이 연수와 웅의 이별 원인이 되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가난하기를 바랐던 연수는 버릴 수 있는 건 웅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를 버렸다. 차마 자신을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웅은 재산과 마음이 넉넉한 부모 아래 태어나 부족함을 모른다. 이런 무심함은 그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가 연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약점도 된다. 웅은 새로이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하고, “난 너 다시 안 만나”라고 말하는 이유가 된다. 2020년대를 사는 우리는 자기가 너무 중요하고 자기를 지켜야만 한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한 장면. SBS 제공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한 장면. SBS 제공

환상과 현실, 회상과 현재가 공존하는 ‘그 해’가 동시대 로맨스로 공감을 산 지점이다. 후반에 들어선 드라마는 이제 연수와 웅은 자의식의 벽을 넘어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그릴 것이다. 둘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도 서로를 지키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이는 늘 우리가 로맨스에서 찾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남의 연애 이야기가 내 마음을 흔드는 순간이다.

박현주 작가 겸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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