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배전공과 로프공의 장갑

하어영 2022. 1.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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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하어영 전국팀장

로프공 밧줄이 끊겼다. 지난해 9월 인천 송도 한 빌딩에서 외벽 청소를 하던 중이었다. 배전공이 감전됐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여주시 한 공사장 인근 전봇대에는 2만2900볼트 고압전류가 흐르는 중이었다.

둘은 하청 노동자였다. 로프공 차아무개씨는 원청(과 계약한) 빌딩 외벽을 탔고, 배전공 김다운씨는 원청(발주처) 전봇대에 올랐다. 둘 다 시간에 쫓겼다. 차씨는 공사기간을 당기려 하청이 재하청해 투입한 인력이었다. 김씨도 마찬가지다. “인력이 없다”며 다른 업체가 급히 작업(파견)을 요청해 관할구역이 아닌 전봇대에 매달렸다.

둘 모두 안전장치는 없었다. 한 사람은 구명줄, 한 사람은 활선작업차가 없었다. 차씨 작업줄이 끊어졌을 때, 김씨 몸에 전기가 흘렀을 때, 추락을 막을 구명줄, 감전을 막을 활선차가 있었다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왜일까. 차씨 업체 쪽은 말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구명)줄이 꼬이면 위험해서”라고 했다. 거짓말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사고 당일 인천 송도는 ‘바람 없는 맑음’이었다. 김씨 업체의 “13만5천원짜리 단순 공사였다”는 무심한 말에 공교롭게 두 업체 모두의 진실이 담겼다. 결국 돈이다. 김씨는 평소라면 작업을 마쳤어야 할 해질녘에 전봇대를 타기 시작했다. 업체 활선차는 모두 다른 현장에 투입돼 있었다. 그가 활선차를 불러달라,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할 수 있었을까. 평소에도 김씨는 활선차 없이 전봇대에서 홀로 일했다. 차씨의 구명줄도 마찬가지다. 구명줄을 걸면 땅까지 시간이 두배 든다. 구명줄을 달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장갑이 사고 원인이라는 점도 닮았다. 원래대로라면 배전공과 로프공 장갑은 관련성이 없다. 차씨는 49층부터 땅까지 늘어뜨린 작업줄이 날카로운 모서리에 쓸리지 않도록 정식 보호대가 아닌 고무장갑을 썼다. 김씨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봇대에서 절연장갑 대신 면장갑을 꼈다. 고무장갑은 쉽게 찢겨 나갔고, 면장갑은 고압전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업체는 어김없이 이 대목에서 당사자 과실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안전장구, 보호대, 이런 것들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차씨 업체 관계자) “(작업자가) 업무를 잘 처리하고자 하는 그런 의욕이 앞선 것 같다”(김씨 업체 관계자) 따위의 말들이 오간다. 문제는 현장 관리인데, 구명밧줄과 활선차인데…. 떠난 이들은 당시 사정을 말할 수 없다. 황망한 유족은 애도할 틈도 없이 위축된다. 결국 차씨 유족은 (인터뷰를 거절하며) 침묵했고, 김씨 유족은 <한겨레> 보도가 나간 날 밤, “기사 제목에서 면장갑이라는 단어를 빼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부탁하실 일이 아니라 저희가 더 헤아렸어야 했습니다만.

이렇게 닮은 죽음은 얼마나 될까. 지난 12월 한달 ‘살아서’ 귀가 못 한 노동자가 63명이다.(시민단체 노동건강연대 누리집 참조) 2021년을 셈하면 814명이다. 여기에 김다운씨는 빠져 있다. ‘814’가 확인된 최소한이라는 의미다. 김씨와 차씨처럼, 김용균씨와 구의역 김군처럼 814명 또한 각자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숫자만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오르지 않으면, 매달리지 않으면,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비집고 서서 살피지 않으면, 그날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보통의 사정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먼저 간 이들의 자리를 채운 ‘지금’의 그들도 마찬가지다.

9일 한국전력은 재발방지 종합대책을 내놨다. 한전 자료를 보면, 김씨를 포함해 2016년부터 감전으로 숨진 노동자만 47명에 이른다. 지난해 사망자만 8명이다. 김다운씨 죽음은 거기에 기록돼 있다. 5년 동안 한해 8명꼴로 감전돼 숨졌다. 공공기관 중 가장 많다. 한명을 제외하고 김씨처럼 모두 하청 직원이다. 한전은 이미 2016년 ‘배전 활선작업 공법’이라는 자료를 내놓고 “안전 최우선”을 밝힌 바 있다. 하나 마나 한 얘기였다. 오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다.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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