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혜화역 엘리베이터의 유래

한겨레 2022. 1.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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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칼럼]규식의 사고 소식을 듣고 야학 사람들이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목과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그를 본 사람들은 지하철공사에 찾아가 항의했다. 하지만 공사는 적반하장으로 규식의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난 거라고 주장했다. 권리도 없고 법도 없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년 후 법원은 규식의 손을 들어주었다. 규식은 이렇게 썼다. "그 경험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신입을 교육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복사기 사용법이다. 노들장애인야학 신입교사가 되었을 때 가뜩이나 기계치인 나는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많았다. 용건이 끝나면 선배들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 복사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들었어요?” 나는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니까 이 복사기로 말할 것 같으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들이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복사기는 어떤 자부심의 징표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무수히 들으면서 야학 교사가 되었다.

1999년 어느 날 야학 학생 이규식이 지하철 혜화역에서 휠체어용 리프트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앞바퀴가 리프트 바깥으로 나가버렸는데 안전판이 제구실을 하지 못해 규식은 그대로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마가 계단에 퍽 하고 부딪치는 순간 그는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어린 시절 집에서 먹고 자는 일만 하다 열아홉살에 시설에 들어갔다. 사람 구경이라곤 못 하는 산속이었다. 첫날 어머니가 떠나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먹고 자고 예배 드리는 일만 하며 20대를 다 보냈다. 서른살이 되었을 무렵 어떤 후원자가 사준 스쿠터를 타고 처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산도 보고 개울도 봤다. 한참 가다 보면 학교도 있고 스케이트장도 나왔다.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밌어서 아침밥 먹자마자 나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그렇게 1년을 보냈더니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스쿠터를 타고 탐험을 계속했다. 어느 날 오르막길을 따라간 그의 눈앞에 장애인야학이 나타났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교사들과 노는 재미에 푹 빠져서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비장애인과 그렇게 어울려본 건 처음이었다.

규식의 사고 소식을 듣고 야학 사람들이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목과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그를 본 사람들은 지하철공사에 찾아가 항의했다. 하지만 공사는 적반하장으로 규식의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난 거라고 주장했다. 권리도 없고 법도 없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년 후 법원은 규식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규식은 보상금 500만원을 받았고 혜화역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죠. 그때 규식이 보상금 일부를 야학에 후원했고 그 돈으로 이 복사기를 산 거예요.” 사람들은 그 복사기가 마치 혜화역 엘리베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늠름하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규식은 이렇게 썼다. “그 경험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일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일의 전조였다. 이듬해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던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했다. 노들야학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외치며 서울역 철로 점거를 감행해 지하철 1호선을 30분간 멈춰 세웠다. 그러자 30년간 갇혀 있던 중증장애인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규식은 본격적으로 장애운동에 뛰어들었다. 야학 수업엔 잘 나오지 않았지만 거리의 투쟁에는 혀를 내두를 만큼 성실했던 그는 귀신같은 능력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고 가장 먼저 길을 만들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쉼 없는 활동으로 2005년 드디어 이동권을 권리로 명시한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작년 말 그 법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가 한 해도 어김없이 돈이 없다면서 법을 지키지 않자, 장애계가 ‘버스 대·폐차 시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 같은 조항을 넣어서 이 법의 강제력을 높여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요구하기 위해 규식은 12월부터 매일 아침 8시 혜화역에서 선전전을 진행했고 출근시간 만원 지하철을 연착시키는 강도 높은 직접행동을 벌였다. 많은 시민들이 무시무시한 비난을 퍼부었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용히 기사를 검색했다가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가 고작 28%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 법은 극적으로 개정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서른살의 규식을 기억하고 그와 함께 이번 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로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할 때면 오늘도 자신이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혜화역으로 출근하는 늠름한 이규식이 떠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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