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문화一流] '독일의 아테네' 바이마르.. 자식 사랑한 모성애가 문화·예술 꽃피웠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2022. 1.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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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대공妃 아나 아말리아, 18세에 혼자된 후 아들 교육 몰두
괴테·빌란트·실러 등 석학 초빙해 자식 가르치고 나라 체계 세워
궁정도서관 정비, 현재 100만권 소장한 '아나 아말리아 도서관'으로

독일의 바이마르는 인구가 6만 정도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지만, 이곳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을 통틀어 손에 꼽는 예술의 도시다. 도시를 지나는 강의 이름을 따서 ‘일름강의 아테네’라고 부르는 이곳은 18세기 이후 유럽 인문 정신의 꽃을 가장 화려하게 피웠다.

그 중심은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였다. 괴테는 바이마르 출신은 아니지만, 50년 이상을 이곳에 살며 인문과 문화와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도시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괴테뿐만 아니라 빌란트, 헤르더, 실러 등 독일 최고의 지성들이 이 작은 도시로 와서 살았다. 그들의 존재는 또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이곳은 고대 아테네를 연상시키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이마르 고전주의’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바이마르란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바이마르 헌법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상한다. 독일제국이 제1차 대전에서 패한 뒤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헌법을 제정한 장소가 바이마르였기에 헌법과 국가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며, 현대건축의 선구자 그로피우스가 디자인과 건축의 교육을 위해 바우하우스를 처음 세운 곳도 바이마르다. 이곳이 독일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하는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작인 괴테는 어떻게 여기 왔을까?

‘아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내부(위 사진). 아나 아말리아가 궁정 도서관을 개조해 만든 이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힌다. 개관 300주년을 맞은 1991년에 ‘아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으로 명명됐다. 아래 왼쪽 사진은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와 실러 동상. 아나 아말리아는 괴테·빌란트·실러 등 지식인을 궁으로 초빙해 아들을 교육하고 나라의 체계를 잡았다. 아래 오른쪽은 아나 아말리아 초상화. /ⓒKlassik Stiftung Weimar, Wikipedia

1756년 바이마르 대공국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18세의 나이에 두 살 어린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 공국의 아나 아말리아(Anna Amalia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1739~1807)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공작은 2년 만에 사망하고, 아말리아 대공비는 8개월짜리 장남과 배 속의 둘째를 가진 채로 18세에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공국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섭정이라고 해도 그녀 역시 10대 소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혜로운 판단력과 굳은 의지로 대공국을 위해 최상의 방법을 찾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공국을 제대로 통치하기 위한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독일의 선구적 지성인이었던 작가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를 아들의 가정교사로 영입하였다. 이어서 의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철학과 문학에까지 영향을 떨쳤던 석학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아나 아말리아는 드디어 괴테를 초빙하였다. 괴테는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는 이미 자연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경제까지 통달한 인물이었다. 괴테는 처음에 광산 운영 책임자로 부임하였으나, 이어 국방위원장을 맡아 군대를 정비하고, 건설국을 맡아 도로를 건설하고, 재정국과 화폐국까지 맡아 화폐를 개혁했다. 만년에 괴테는 미술학교⋅식물원⋅박물관의 책임자도 되어, 책상 위의 이론을 실제 정치와 행정에 적용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괴테에 의해서 그와 나란히 추앙받는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마저 바이마르로 왔다.

그렇게 아나 아말리아의 모든 열정은 국가의 체계를 잡고 아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바쳐졌다. 그리고 19년이 지나서 즉 아들이 성인이 되자, 그녀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지체 없이 퇴위하였다. 그녀는 궁전을 물러나와 흔히 과부궁(寡婦宮)이라고 불렸던 작은 저택으로 옮겨 살았다. 아나 아말리아는 책을 좋아했던 친정아버지의 영향으로 다독가였으며 자신이 외국 서적을 번역하거나 작곡할 만큼 교양이 뛰어났다. 그녀는 독일 최고의 학자와 작가와 예술가들을 자신의 궁으로 초대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매주 그곳에서 열리던 독서회⋅강연회⋅음악회에는 유럽 최고 수준의 지성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녀의 거실에서는 빌란트와 헤르더와 괴테와 실러 등 4대 지성이 함께 앉아 시를 낭독하고 정세를 토론하고 음악을 같이 듣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광경이 벌어졌다. 독일의 모든 문화예술인들은 바이마르를 방문하는 것을 소망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아나 아말리아 모후와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 시절에 바이마르는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나 아말리아가 펼친 여러 활동 중에서 중요한 것이 도서관을 정비하고 확장한 것이었다. 역대 대공들이 소장했던 장서를 모아놓은 궁정도서관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바탕으로 초록궁을 로코코양식으로 개조하여 아름다운 도서관을 만들었다. 나중에 괴테가 30년 이상이나 도서관장을 맡으면서 장서는 8만권으로 늘어났다.

1991년에 도서관은 개관 300주년을 맞아 ‘아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으로 명명되었다. 이후로 현대적 시설의 신관을 세우고 무려 100만권을 보유한 거대한 수장고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에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5만권의 귀한 고서들이 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도서관은 다시 공사를 하여 2007년에 재개관하였다. 1000억원을 들여 당국은 불에 탄 책들과 똑같은 책을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구입했고, 각국 독지가들로부터 증여받아 원래 장서와 거의 같은 목록을 완성하였다.

아들의 장래를 위한 어머니의 지극정성은 국가의 번영은 물론이고, 그곳을 독일 문화의 수도로 만들었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했던 활동은 가진 자가 공동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바이마르라는 도시 이름이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어떤 식으로라도 남아 있다면, 현명하고 강인했던 덕성과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통찰력을 지녔던 한 여성의 지성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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