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용의 직관]시대정신 & 실용주의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2022. 1. 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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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선판에 자주 소환되는 두 개의 철학 개념이 있다. 실용주의와 시대정신이다. 특히 이번 대선은 두 개념의 프레임 전쟁이다. 먼저 윤석열이 올라타려는 시대정신부터 보자.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시대정신은 말 그대로 한 시대를 규정하는 정신이나 가치다. 그럼 어느 시대나 그 시대만의 고유한 지배적 가치가 있을까? 18세기 이전까지는 시대정신이란 말조차 없었다. 정신이 시대마다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정신은 시대 초월적 보편 가치의 상징이었다.

헤겔은 시대마다 고유한 가치가 있고, 모든 가치는 변화 속에서 보편성을 축적한다고 생각한 첫 번째 학자다. 그 원본성을 인정해 영어권조차 시대정신을 독일어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고 말한다. 헤겔은 19세기 초 유럽 문제를 분열로 파악하고, 이 분열을 통합하는 힘으로서 ‘자유의식의 확장’을 시대정신으로 삼는다. 헤겔 철학은 곧 자유의 철학이 된다.

‘원칙 있는 실용주의’만이
증오·분노 장벽 넘어설 수 있어
이곳 실용주의는 성장의 민주화
바로 이재명이 가야 할 길이다
윤석열의 시대정신은 흐름 역행

20세기는 두 가지 시대정신인 자유와 평등의 냉전시대였다. 평등 없는 자유가 자유 없는 평등을 압도하며 20세기가 닫힌다. 그럼 21세기 시대정신은? 보수의 야간 총괄선대본부인 조선일보 논객들이 유독 시대정신 찾기에 혈안이다. 특히 ‘윤평중 칼럼’은 이런저런 시대정신에 윤석열과 이준석을 태운다. 노골적인 정파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지식인의 생명인 현실성을 잃은 듯싶다. 시대를 거스르려는 욕심 때문에 시대정신의 다원화 현상조차 놓친 것이다.

1989년 12월25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두 가지 시대정신이 충돌하던 시대는 끝났다. 하나의 시대정신이 승리해서가 아니다. 정반대다. 어떤 정신 가치도 독재할 수 없는 시대, 곧 다원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니 한두 가지 시대정신에 올라타 나라를 호령하려는 지도자는 시대에 역행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연대, 공정과 신뢰, 공공성과 친밀성, 인간과 자연, 성장과 분배 중에 어느 하나도 배타적 우선성을 주장할 수 없는 시대다. 대부분의 정치적 문제는 이런 높은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발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용주의가 등장한다.

실용주의는 19세기 말 남북전쟁 후 태동한 미국의 철학이다. 이때까지 유럽에서 수입했던 사상은 당시 미국이 겪은 극심한 갈등 해결에 도움이 못됐다. 남부와 북부의 지역갈등, 백인과 흑인의 인종갈등, 종교와 과학의 이념갈등을 극복하는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퍼스, 제임스, 듀이가 제작한 철학이 실용주의다. 특히 듀이에게 실용주의는 도구주의였다.

20세기 세계 패권국가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말보다 행동, 이념보다 실천, 의도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도구의 철학을 선호한다. 효율성, 유용성, 실용성을 가치 평가와 실현의 기준으로 삼는다. 다양한 정책들의 현금 가치를 계산하고 민주적으로 문제 해결의 길을 찾는 방법이다. 이 맥락에서 로티는 21세기 실용주의를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로 규정한다.

실용주의에는 다양한 변용이 있다. 이를 다소 과격하게 둘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다른 모든 가치보다 실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주장하는 ‘이념적 실용주의’다. 이 실용주의는 어떤 것이 참이고 옳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 아니라, 유용한 것만이 참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실용성을 가치가 아니라 태도로 이해하는 ‘실천적 실용주의’다.

실천적 실용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가치와 시대정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거꾸로다. 실천적 실용주의는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을 갈등이 아니라 화합, 증오가 아니라 협력, 배제가 아니라 균형 속에서 문제 해결에 활용한다. 그러니 정치 지도자의 태도로서 실천적 실용주의는 하나의 원칙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지만 원칙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맥락에서 독일 5대 총리이자 빌리 브란트와 함께 사민당을 대표했던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는 ‘원칙 있는 실용주의’만이 증오와 분노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명박의 ‘원칙 없는 실용주의’는 실패했다. 이재명의 실용주의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21세기 실용주의 대변자 로티의 말처럼 노동자가 최고경영자(CEO)의 20분의 1의 임금을 받는 경제적 억압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사회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재명의 실용주의가 바로 이 지점에서 경제적 풍요와 공정한 복지, 기회균등과 생활균등을 조화시키는 실천적 도구로서 ‘원칙 있는 실용주의’로 가길 바란다. ‘지금, 여기’에서 실용주의는 성장의 민주화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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