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색사회'를 넘어서

한겨레 2022. 1. 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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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나는 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묘사하기에 ‘구색사회’가 제격이라고 생각해왔다. 우리 사회의 여러 면면을 보면, 균형이 잡혔다고까지 하기는 어려워도 최소한의 구색 정도는 갖춰져 있다. 정치만 해도 그렇다. 여성과 청년은 물론이고 장애인과 이민자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사실상의 양당제라고는 해도 정의당 같은 진보 정당도 원내에 진출해 있다. 사실 정치나 공적 영역은 구색사회의 성격이 가장 뚜렷한 부문이다. 민간 영역은 애써 구색을 갖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국은 구색사회가 되었을까? 두가지 계기가 두드러진다. 첫째, 1980년대 민주화다. 이 격랑을 타고 그동안 억눌려 있던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가정에서, 생산 현장에서, 그리고 공적 장에서 억눌려 있던 여성들의 외침이 유독 두드러졌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할당제라는 것이 그렇게 출현했다. 이들과 함께 학생운동, 빈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이들 중 극히 일부가 체제의 구색을 이루게 되었다. 몇몇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대학에도 ‘진보 교수’ 한두명은 세워둬야 학생들이 잠잠해졌다.

한국을 구색사회로 만든 두번째 결정적 요인은 빠른 경제성장이다. 그것 덕분에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야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샴페인’이 문제였다. 터뜨린 것까진 좋았다. 축하받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우린 그걸 마실 줄을 몰랐다는 거다. 막걸리였다면 어땠을까?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선진국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지난 25년간 구색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의 구색사회는 그 결과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구색이라도 갖춰진 게 낫지만, 이를 좋게만 볼 수도 없다. 무엇보다 구색사회에선 실속보다는 겉치레가 앞서기 때문이다. 정부의 민간 위원회는 구색의 대표적인 예다. 위원회는 그 자체가 대체로 구색용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위원회의 역할이나 성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는 위원진의 구색을 성별, 지역별, 연령별 등으로 맞추는 게 가장 큰 과업인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청년이나 지역 대표에게 기대하는 게 없으니, 구체적으로 누가 대표가 될 것이고 그가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구색이 되기에 적당한 ‘스펙’을 갖춘 사람이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보니, 여기서 봤던 대표가 저기서 또 보이는 일이 허다하다.

구색사회는 양극화되어 있다. 우리 사회의 허다한 세력과 가치 가운데 어디까지를 구색용으로 삼을 것인가? 그 경계는 양극화의 커다란 한 축을 이룬다. 정의당은 우리나라 진보 정치세력의 전부는 아니지만 공적 영역에서 ‘진보’를 대표하는 ‘구색’임을 부정할 순 없다. 누가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다. 정의당 말고도 다른 진보 정당들이 있지만 제도정치권도, 언론도 그들에겐 관심이 없다.

어차피 허울뿐이니 구색을 없애야 할까? 아니다. 체제는 그들을 체제의 치장을 위해 동원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소외된 세력과 인기 없는 가치를 대표하는 ‘대표선수’, ‘마중물’, ‘불쏘시개’다. 구색의 궁극적인 사명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가치를 일반화해 구색을 없애고 구색사회를 타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구색의 의미가 늘 한결같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구색사회를 유지하는 대표적 제도인 할당제만 봐도 그렇다. 애초 할당제는 저 바닥에서 끓어오르는 힘을 제도권이 ‘여기까지만’이라고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누가’ 구색이 되느냐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니가 가라, 하와이.’ 결국 중요한 건 저 밑바닥의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구색의 의의가 크게 쪼그라든 것 같다는 느낌이다. 밑바닥의 힘이 약해져서일까? 어차피 구색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이 굳어져서일까? 할당 비율은 무의미한 숫자가 되었고, 대의가 희미해진 곳에선 개인의 의지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구색은 일종의 특권이자 개인적 ‘스펙’이 된 것이 아닌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거기에 있다는 게 더 중요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학생운동 출신 국회의원도, 진보 교수도, 정부의 민간 위원회도, 정의당도 모두 이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구색사회란 구색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구색이 가장 보잘것없어진 사회다. 어떻게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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