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한열 어머니'에서 '민주화 투사'로 살다 간 배은심

한겨레 2022. 1. 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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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9일은 '그날'이었다.

"1987년의 그날 이후 나는 세월에 끌려가듯 살았다. () 한열이가 못다 만든 세상을 내가 이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막막하고 두려울 때는 한열이와 둘이 간다고 생각했다." 202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1987 그날>의 추천사에서 배은심 선생이 몇 문장으로 길어올린 자신의 생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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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9일 고 이한열 열사의 34주기 추모행사가 열린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한열동산’에서 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선생이 발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6월9일은 ‘그날’이었다. “1987년의 그날 이후 나는 세월에 끌려가듯 살았다. (…) 한열이가 못다 만든 세상을 내가 이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막막하고 두려울 때는 한열이와 둘이 간다고 생각했다.” 202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1987 그날>의 추천사에서 배은심 선생이 몇 문장으로 길어올린 자신의 생애사다. 9일, 그가 82년의 생을 마감했다. 35년 세월을 하루하루 ‘그날’로 잇대어가며 아들이 못다 틔운 씨앗을 널리 뿌리고 애써 일구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아들 곁으로 갔다.

‘그날’은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피격당한 날이다. 그는 7월5일 눈을 감았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6월 민주항쟁은 불타올랐다. 앞서 1월14일 경찰의 물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 열사와 더불어 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이 없었다면 6월 항쟁은 물론 그 뒤 험난했던 민주화 과정도 생각하기 어렵다. 배 선생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선생,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 선생 등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며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져왔다. 그들이 있는 곳이 곧 투쟁의 현장이었다.

배 선생은 유가협 회장으로 두분 선생과 함께 1998년 422일의 장기 농성을 벌인 끝에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보상법’ 제정을 끌어냈다. 2009년 용산참사 때는 용산범대위 공동대표를 맡아 공권력에 희생된 세입자들을 위해 싸웠고, 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의 투쟁과 2016년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투쟁 현장에 언제나 함께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2020년 박정기 선생과 함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로도, 지난해 6월 이후 최근까지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열의를 불태워왔다.

배 선생의 별세는 민주화운동의 한 시대가 지나고 있는 확연한 징후이기도 하다. 세분의 대표적인 ‘부모 민주화운동가’가 모두 떠났고, 지난해 2월15일에는 백기완 선생도 눈을 감았다. 더욱이 민주주의 가치가 혼탁하게 교란되고 있는 지금, 고인의 영면을 빌면서도 마음 한켠은 무겁기만 하다. “한열이는 평등을 외치다 죽었다. 평등이란 게 세상 사람 모두 같이 어울려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게 민주화고 민주주의라 믿는다.” 배 선생이 <1987 그날>에 남긴 짧은 문장이 더없이 엄숙한 숙제로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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