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유림이 전하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비밀
[경향신문]
지난해 최고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한국인 언어장애인 배우 유나 역
대본을 감정 없이 읽어나가는 연습
“과학실험 같아…내 안에서 무언가 일어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신비한 영화다. 주인공의 사연을 전하는 도입부를 지나면 오래된 사브 자동차 안에서의 대화, 연극 <바냐 아저씨>를 연습하는 장면으로 179분의 상영시간을 상당 부분 채운다. 단조롭고 지루할 수 있는 구성이지만 그 어떤 화려한 영화보다 관객을 몰입시킨다.
지금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일본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지난해 개봉작 중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지난달 개봉해 다양성 영화로는 성공적인 수치인 3만 관객을 돌파했다. 하마구치의 연출 방법을 이 영화에 출연한 한국인 배우 박유림(29)을 만나 전해 들었다.
박유림은 영화에서 <바냐 아저씨>에 출연하는 한국인 배우 유나 역을 맡았다. 출연 장면은 7~8곳 정도로 많지 않지만,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잊기 힘든 중요한 역할이다.
“‘영화감독’ 하면 떠오르는,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는 아니었어요. 언제나 푸근하고 대화도 많이 했습니다.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불편을 느끼는 건 없는지 일일이 체크했어요. 다만 촬영할 때는 엄청나게 집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감독님에게 눈이 하나 더 있어서 내가 보지 못하는 걸 본다는 느낌이었달까요.”
박유림은 몇 편의 텔레비전 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첫 출연작이다. 한국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이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드라이브 마이 카>에 캐스팅됐다. 3차에 걸친 오디션 때는 주어진 대본을 잘 표현하거나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평상시 어떤 모습인지 알리는 데 중점을 뒀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연극 연출가다. 그는 배우들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대본을 반복해 읽는 방식으로 연습을 시킨다. 극중 <바냐 아저씨>에서는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 등 다양한 문화권의 배우들이 각자 언어로 대사를 한다. 가후쿠의 연출 방법은 곧 하마구치의 방법이기도 하다. 박유림은 “마치 과학실험을 하는 것 같았다. 촬영 전 혹은 촬영 중 연습 때도 감정을 배제한 채 대사를 연습했다. 이렇게 연습하다가 직접 연기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보자’는 생각이었다”고 돌이켰다.
“영화 속 가후쿠가 유나와 재니스의 연기를 보면서 ‘방금 뭔가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잖아요. 하마구치 감독님이 정의하는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충동’을 느꼈습니다. 먹는 연기든 마시든 연기든, 촬영 전에 그런 모습을 준비해 가잖아요. 이 영화에서 연기하면서는 정말 무언가 먹고 마시고 싶다는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 일어난 거죠.”
하마구치는 배우들의 ‘진짜 느낌’을 강조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 느끼면 표현 안 해도 된다”고까지 했다. 신인 배우로서 감독의 확고한 연출이 없다는 건 난감한 일일 수 있다. 박유림은 “연출은 명확해 보이지 않지만, 감독님 생각은 명확했다”며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반복해 대본을 읽다보니 감독님과 동료 배우에 대한 믿음이 생겨서 불안보다는 기대가 커졌다”고 말했다.
박유림은 이 영화를 세 번 봤다고 한다. 그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각자 상황에 따라 달리 들리는 이야기를 가진 <드라이브 마이 카>는 배우가 아니라 관객으로서도 좋아하는 영화라고 했다. 박유림은 영화 속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로 캐스팅된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의 대사가 특히 좋다고 했다. 다카츠키는 차 안에서 카후쿠에게 말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마음과 능숙하게 솔직하게 타협해 가는 것 아닐까요. 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영화 종반부 <바냐 아저씨>가 무대에 오른다. 실제 <바냐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소냐 역을 맡은 유나의 수어 대사로 막이 내린다. 소냐는 바냐를 뒤에서 안은 자세로 대사를 한다. 바냐는 소냐의 손을 유심히 본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일견 행복하고 안정적이며 자신의 일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사실 심각한 마음의 고통을 힘겹게 견디고 살아온 인물들을 어루만지는 핵심 대사다.
<드라이브 마이 카> 캐스팅 전, 박유림은 ‘배우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고 한다. 성과 없이 이어지는 오디션들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배우는 직업으로선 너무 힘든 일”이라며 “늦어도 괜찮고 앞으로 어떻게 돼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자신과 타협했다”고 말했다. 박유림은 올해에는 제주에서 1년 정도 살아보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짜고 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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