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시행 본질 흐리는 기업들.."처벌 공포감보다 노동자 안 죽게 만들어야"

이혜리 기자 2022. 1. 9. 16: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지난해 1월5일 CJ 고교현장실습 일터 괴롭힘으로 사망한 고 김동준씨의 어미니 강석경씨, 추락 사망한 건설노동자 고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현씨, 조선우드 파쇄기에 끼여 사망한 고 김재순씨 아버지 김선양씨, tvN 고 이한빛PD 동생 이한솔씨,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 노동자 김영환씨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오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한국전력 하청업체 소속 30대 노동자의 감전 사망 등 산업재해 사고가 논란이 되는데도 기업 처벌에 대한 공포감 조성으로 법 취지가 퇴색되는 분위기다. 급기야 지난 4일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법 집행이 엄정하게 이뤄지고 사업자들이 과도하게 걱정하지 않도록 유의해달라”고 말했다. 한국이 최악의 산재 공화국으로 불리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책임 회피보다는 제대로 된 안전체계 구축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 등 기업 쪽의 대표적인 주장은 중대재해법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 개인을 형사처벌해 과도하다는 것이다. 특히 법문이 모호해 선의의 피해를 입는 사업주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모든 사업장의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이 아니다. 법을 살펴보면,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경우 처벌하도록 돼있다. 즉 평소 재해 예방을 위해 인력·예산을 투입하거나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중대재해법이 지난해 1월 제정된 뒤 시행까지 1년의 기간이 있었고, 정부는 체계 구축을 지원했다.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처벌되려면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이 입증돼야 하는데, 경영계 우려만큼 지나치게 많은 처벌 사례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산업안전보건법과 비교해 중대재해법이 더 명확하다”며 “모호함이 있을 때는 가급적 수범자(기업) 입장에서 법 해석·적용을 하게 될 것이고, 수사·재판 과정에서 변론의 기회가 있는데 경영계가 마치 그런 기회조차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심재진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새로운 형태의 법이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경영자들이 우려할 정도로 법 규정이 모호하지는 않다”며 “향후 판례나 실무 사례를 통해 사업주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가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1월 200쪽이 넘는 중대재해법 해설서를 냈다. 지난달엔 중대시민재해 중 시설물·공중교통수단과 관련해 국토교통부가, 제조물과 관련해 환경부가 해설서를 냈다. 다만 기소 여부를 결정할 검찰은 아직 해설서를 내지 않았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법 시행 이전에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는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안전보건 확보 의무 위반에 대한 (사업주·경영책임자의) 고의 뿐 아니라 양자간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법으로 올해 기소되는 사람이 10명을 넘기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며 “기업들이 법이 모호하다고 흔들 게 아니라,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준수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정승일 한국전력공사 사장(왼쪽에서 세번째)을 비롯한 임원진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전 아트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전력 하청업체 노동자 감전 사망사고’와 관련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중대재해법 적용이 3년 유예되고,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적용이 배제돼있다. 9일 윤미향 무소속 의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 사고 사망자 828명 중 약 80%가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노동계는 중대재해법이 당장 산재 사망 감축에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또 도급·용역·위탁과 같은 계약 형식에서는 원청이 하청업체 사고에 대해서도 책임지지만, 공사를 아예 하청업체에 맡기는 발주는 원청 책임을 규정하지 않는 등 법 제정 과정에서 경영계 입장이 반영됐다.

일각에선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 사업주들이 부담을 느껴 고용 규모를 줄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이 있다. 중대재해법이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도록 규정하기 때문에 안전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오히려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계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법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만, 이는 한국 형법 체계와 어긋난다는 반박이 나온다. 호주와 같이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해외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심 교수는 “근로자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는 기업 경영에서 굉장히 중요한 정책이 돼야 한다”며 “그동안 그것을 안 해왔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이고, 세계적인 추세로 봐도 그렇다”고 했다.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해온 시민사회에선 기업들의 우려 속에서 중대재해법 제정의 취지가 잊혀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은 “강한 처벌은 왜 중대재해가 반복되는지, 그 원인을 고민한 끝에 나온 수단”이라며 “중요한 것은 이 법이 사업주를 단순히 처벌하자는 게 아니라, 사업주들이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 하도록 만들자는 데 있다”고 했다. 권 사무처장은 “경영계가 (처벌에 대한) 공포감을 만들기보다는 사업주들이 중대재해를 막기 위해 해야 되는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 고용구조와 안전보건체계는 어떻게 마련해야 되는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