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된 예술 생태계 향해 분별의 미덕을 캐묻다

반이정 미술 평론가 2022. 1. 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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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숨은 메시지

(시사저널=반이정 미술 평론가)

'내 차를 운전해'쯤으로 변역될 제목. 운전석에 젊은 여성이 앉은 빨간색 사브 900 승용차에 기댄 중년 남성을 담은 포스터. 주요 전환점마다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촉매로 설정된 장면들. 많은 관객이 궁금해하는 결말의 해석, 즉 뜻밖의 장소에서 누군가와 그 차가 재등장하는 장면의 의미까지. 빨간색 사브 승용차는 출연진 명단에만 없다 뿐이지, 존재감은 무겁다.

2021년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일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소설이 원작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많다. 비중 있는 빨간색 사브 승용차가 하루키의 소설에선 노란색이었다. 감독은 녹색 산과 나무가 노란 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던 터에 차를 수배한 담당자가 빨간색을 타고 왔길래 그걸로 정했단다. 영화는 제목과 홍보 문구에서 하루키의 단편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원작으로 썼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소설이 실린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함께 수록된 《셰에라자드》와 《기노》라는 두 단편소설을 뒤섞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문학을 연극이나 영화로 옮기는 각색의 일반론을 넘어, 소설가의 원작을 영화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새 결과물로 다시 썼다고 봐야 한다. 하루키의 원작도 비틀스가 1965년 발매한 동명 팝송에서 가져왔으니 음악, 문학, 영화가 장르를 초월해 연결되대, 다른 모양새로 새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겠다.

영화가 결말부로 흐를 무렵에야 상영시간이 꽤 많이 흐른 걸 문득 직감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시계를 보니 3시간여가 흘렀더라. 쉴 틈 없는 스펙터클이나 역동적인 화면이 일절 없고 속사포 같은 대사는 고사하고 단답형 대화와 침묵 일색인 영화에 어떻게 3시간여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한 걸까? 《드라이브 마이 카》는 내게 예술은 지금 무엇인가에 관해 자문하는 시간을 줬다.

봉준호 감독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대화하는 모습ⓒ㈜트리플픽쳐스 제공

음악·문학·영화가 장르를 초월해 연결

영화에서 '이야기 짓기'는 액자식 구성으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도입부에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의 아내 오토가 섹스 직후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하나다. 섹스 상대와 대화하며 이야기에 살을 붙여 완결된 듯 완결되지 않은, 결말을 열어놓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 《바냐 아저씨》를 일본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 4개 국어에 수화까지 더한 다국어로 가후쿠가 연출한 연극이다. 무대 상단 스크린에 4개 국어로 번역한 대사가 관객에게 전달되고 상대의 모국어를 알아듣지 못한 배우라도 지겹도록 반복된 연습으로 서로 연결되는 경험을 한단다.

관건은 《바냐 아저씨》의 이야기에서 주인공 가후쿠가 직면한 문제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가후쿠의 현실과 《바냐 아저씨》라는 허구·예술은 이어지고 나아가 가후쿠의 번뇌를 지켜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도 스스로 외면한 자신의 번뇌를 거울 보듯 바라보게 된다는 것. 3시간은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일본 특유의 고가도로를 달리는 빨간 차, 바다와 산이 에워싼 현대적 교각 위를 지나는 빨간 차, 긴 터널을 통과하고 심야를 달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의 농촌에 당도하는 빨간 차. 이처럼 이동하는 차를 원거리에서 잡은 영화 속 숱한 장면은 미려한 경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림과 사진이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독보적인 깊이를 지녔다. 이유는 차량이 이동하는 장면 전후에 차에 탑승한 인물들의 절제된 의사소통이 연결되면서 시너지를 만들기 때문인 듯했다.

"분별력을 기르게. 내가 해줄 말은 그뿐이야." 연출자 가후쿠가 연극에 캐스팅된 배우 다카쓰키에게 던진 이 충고는 전후 맥락과는 별개로 가후쿠의 분별과 절제를 표상하고, 3시간이 조금 안 되는 긴 영화에 관람 내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질감이기도 하다. 분별과 절제는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성찰과 관객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세간의 영화 연출 공식을 따르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격한 감정 표정과 극단적인 대사로 응할 법한 장면마다 '예'나 '그랬군'처럼 절제된 단답형 내지 눈빛으로 답을 대신하는 장면이 많다. 극 중에서 나온 대사를 빌려 말하면 '침묵이 금'인 영화쯤 될까.

감각자극을 최대치로 짜낸 화면과 대사, 개연성 따위는 어물쩍 도약하는 이야기로 구성된 여느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면, 방금 본 허구와 현실이 물과 기름처럼 선명하게 갈릴 것이다. 이에 반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사소한 화면 하나 허투루 배치하지 않는다. 스크린 밖의 관객이 스크린 안과 이어진 듯한 현장감 때문인지 관람 시간이 숨 쉬듯 지나간다. 차에 탄 사람에게 중력을 못 느끼게 할 만큼 노련한 미사키의 운전 솜씨가 그녀의 불행한 유년과 연결됐음을 피치 못할 대화 중 털어놓은 고백에서 관객은 확인한다. 자신을 사진 찍는 행위에 병적으로 격분하는 배우 다카쓰키의 영문 모를 태도도 영화 말미에서 그가 연루된 뉴스 보도를 통해 납득하게 된다. 생의 결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이 영화의 연출은, 불특정 다수의 취향을 고르게 충족시켜 성공가도를 쫓는 현세의 주류 영화와 다른 길을 간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장면ⓒ㈜트리플픽쳐스 제공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장면ⓒ㈜트리플픽쳐스 제공

예술과 인생 이야기도 서로 연결돼야

지난 칼럼(1680호 전례 없는 감염병 사태에도 미술계 '호황' 왜일까 기사 참조)에서 필자는 투자에 최적화된 미술이 작품의 완성도를 넘어 미술판의 역학구도에서 절대 기준으로 떠오른 최근 미술판의 흐름을 지적하면서 예술의 언어보다 시장경제의 언어로 유통되는 지금 미술의 판세로부터 느끼는 격세지감과 외로움을 털어놓은 바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몰입하면 극 중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대본 연습 장면과 후일 연극 무대에까지 오르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대본과, 영화의 원작으로 선택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세 편을 찾아 읽고 싶은 욕망이 든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 관람이 끝났어도 관람자는 영화와 연결된 이야기들을 찾아 또 다른 길을 떠나게 된다. 그로써 이야기는 종결되지 않고 새 이야기로 이어진다. "우리 살아요. 운명이 준 시련을 끈기 있게 참고… 열심히 일하다가… 기꺼이 죽음을 맞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름답고 멋진 삶을 보게 될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지난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회상하며 편히 쉴 수 있겠죠."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사는 편향된 예술 생태계의 시련에도 지켜야 하는 분별의 미덕을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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