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FA컵에서 드라마틱한 승부가 많이 나오는 이유
‘역대급’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온갖 영역에서 너무 남발하는 탓에 반감이 좀 있다. 그런데 2021년 FA컵 결승전은 단언컨대 역대급 명승부였다. 이 말을 자신 있게 쓰는 이유는, 1996년 첫 대회부터 역대 FA컵 결승전을 다 챙겨 봤기 때문이다!
FA컵은 국내 성인 축구 최강팀을 가리는 대회다. 최상위 프로리그 팀부터 생활축구 팀까지 모두 참가한다. 이 무대 최고의 매력은 ‘이변’이다. 하위 리그 팀이 상위 리그 팀을 꺾거나 아마추어 팀이 프로 팀을 잡는 경기가 종종 나온다. 이 대회의 원형을 만든 잉글랜드에서는 ‘FA컵 마법 10선’이나 ‘자이언트 킬링(강자 잡는 약자) 톱 5’ 같은 콘텐츠를 심심찮게 뽑아낼 정도다.
올해 결승에 오른 팀은 대구FC(K리그 1)와 전남드래곤즈(K리그 2)였다. 결승 진행 방식은 홈앤드어웨이. 전남 홈인 광양에서 열린 1차전(11월24일)에서 대구가 1-0으로 승리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던 뻔한 스토리. 대구는 상위 리그에서도 경쟁력을 보이는 팀이고, 세징야와 에드가라는 국내 최고 수준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2차전(12월11일)이 0-0 무승부로 끝나도 우승컵은 대구의 몫이었다.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결과부터 정리하면 전남이 4-3으로 승리했다. 1, 2차전 합계 스코어 4-4가 되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대구 원정에서 네 골을 넣은 전남이 우승했다.
축구 팬들이 열광할 만한 요소가 모두 녹아난 경기였다. 우선 골이 많이 터졌다. 7골은 FA컵 결승 역사상 최다 골이다. 그 과정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시소게임이었다. 전남이 골을 넣으면 대구가 따라붙고 전남이 골을 추가하면 대구도 골로 응수했다. 득점원도 모두 달랐다. 7명이 골을 넣었다. 어디에서 누가 골을 뽑아낼지 알 수 없는 흐름이었다는 뜻이다. 양 팀에서 각각 한 명씩,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하는 선수까지 나왔다. 희비극의 교차로 꽉 찬 90분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2부 리그 팀 최초로 FA컵을 들어올렸다. 이것으로 전남은 내년에 열릴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을 손에 넣었다. 역시 2부 리그 팀 최초의 도전이다.
우승을 이끈 전남의 전경준 감독은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회고한다.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선수들 대부분이 울었다. 나도 (감정이) 많이 올라와서 수석코치와 몰래 빠져나와 한참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우리가 우승할 거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털어놓는 우승의 원동력. “장기 레이스인 리그(K리그 2)와 달리 FA컵은 토너먼트로 치러진다. 약팀이 강팀을 이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처음부터 잘 준비하면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FA컵 우승으로) ACL에 출전하게 되면 경기력에 더 신경 써야 하고, 좋은 경기를 보이려면 좋은 선수를 확보해야 한다. 더 좋은 선수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살리고 싶었다.”
서울과 안양의 13년 묵은 장외 싸움
바로 여기에 FA컵의 마법이 숨어 있다. 약팀들에게는 특별한 동기부여가 생긴다. 전력 차를 뛰어넘게 만드는 힘이다. 2021년 기준으로 FA컵에 참가한 팀은 모두 53개. K리그 1과 K리그 2를 포함한 프로 22개 팀에 K3부터 K5까지 아마추어 31개 팀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K3와 K4는 일반 회사에 속한 축구팀으로 세미프로의 성격을 띠고, K5부터는 생활축구로 분류된다(놀랍게도 한국에는 7부 리그까지 있다). 그러니까 동네 조기축구에서 볼 좀 찬다는 분들에게까지 기회가 열려 있는 무대다. 그나마 전남은 3년 전까지 1부 리그에서 뛰었던 경험으로 대등한 경기력을 논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하위 리그 팀들은 무모해 보이는 싸움에 모든 걸 건다.
사연도 다양하다. 프로를 상대하는 것만으로 ‘인생 경기’를 준비하는 직장인 팀이 있다. 청소년 대표 출신의 유망주로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다 3부 리거가 되어 친정팀을 상대하는 선수의 이야기도 애틋하다. FA컵이어서 가능했던 화학작용도 있다. 2017년 32강전에서 만난 서울과 안양의 경기는 그라운드 승부보다 13년 묵은 장외 싸움으로 더 화제가 됐다. 서울의 전신인 안양LG치타스가 서울로 연고를 옮기고, 2012년 ‘남겨진’ 팬들 주축으로 만들어진 시민구단이 안양FC였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은 안양 팬 500여 명은 홍염을 터트리며 “부숴버려!” 같은 격한 구호를 쏟아내기도 했다. 홍염은 경기장 반입 금지 품목인데, 안양 팬들은 경기장 출입금지나 벌금 같은 징계를 감수했다. 어차피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대결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드라마틱한 반전을 만들진 못했지만 FA컵이어서 가능한 대진과 신경전이었다.
중립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기에서 대체로 약자 편을 든다. 약자는 강자에 비해 가진 게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뻔한 공식이 아니라 ‘다른’ 대응을 준비한다. 종종 의외성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반면 이른바 강팀은 잃을 것이 두렵다. 더 많은 상금이 걸려 있는 챔피언스리그에도 신경 써야 하고, 리그에서도 우승 혹은 생존 싸움을 벌여야 한다. FA컵에 전력을 쏟을지, 1.5군을 내보내야 할지 고심한다. 여러 선택지를 손에 쥔 팀과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팀의 대결이라면, 보통은 후자를 편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복은 축구 드라마의 고전적 레퍼토리이기도 하고.
다시 전남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2부 팀의 성취는 또 다른 시사점을 준다. K리그 2의 경쟁력이 상승했다는 점이다. K리그를 중계하는 서호정 해설위원은 인식의 벽이 개선됐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안양 공격수 김경중의 연봉은 3억5000만원 수준인데, 1부에서는 두드러질 기회가 많지 않았다. 2부 팀으로 이적한 뒤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서 위원은 “예전에는 ‘내가 왜 2부로 가?’라는 선수들이 많았다면 2~3년 사이 뛸 기회를 찾아 자진해서 내려가는 경우가 늘었다. 2부 리그를 재기의 무대,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인식이 생겼다”라고 말한다. 승격을 위해 투자 의지를 보이는 팀도 늘었다. 자연스럽게 경기력이 개선됐다. 일종의 선순환이다.
FA컵에서 우승한 전남은 이제 K리그를 넘어 아시아 무대를 바라본다. 2부 팀으로 써나갈 새로운 도전사가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우린 또 이 ‘약자’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배진경 (전 <포포투>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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