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 장례식에서 평생의 동성 연인 베르제 만나[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이브 생 로랑②
이브 생 로랑은 1957년 10월 30일 크리스찬 디올의 장례식에서 평생의 파트너이자 동성 연인 피에르 베르제 서점 중개인을 만났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이 군 병원에서 약물에 취해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크리스찬 디올이 수석 디자이너를 이브 생 로랑에서 마크 보앙으로 교체했을 때 디올 하우스를 상대로 1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다지이너에서 해고됐을 때 베르제에게 “그렇다면 우리 함께 회사를 만들자. 경영은 당신이 맡는 거야”라고 말했다. 베르제는 자금을 모으느라 동분서주한 끝에 미국인 투자자 제스 마크 로빈슨에게 투자를 받았다. 이브 생 로랑과 베르제는 1961년 12월 ‘이브 생 로랑 퀴트르 하우스’를 설립했다.
1962년 1월 29일 이브 생 로랑은 베르제의 도움으로 스폰티니 거리의 어느 저택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피 재킷( 엉덩이 길이의 직선적인 코트로 더블 여밈이 특징)’과 바지, ‘튜닉(그리스·로마 시대에 착용된 통자 스타일의 무릎 정도 길이에 장식이 거의 없는 느슨한 의복)’이 대성공을 거뒀다.
미국 잡지 라이프는 “이브 생 로랑은 샤넬 이후 최고의 슈트 메이커”라고 평가했다. 1963년 아티스트 카산드라는 이브 생 로랑의 이니셜을 사용해 로고를 만들었다. 이 로고는 오늘날 향수·코스메틱·액세서리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이브 생 로랑의 핵심적 이미지가 됐다. 브랜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이브 생 로랑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다.
턱시도 ‘르 스모킹’, 트레이드마크 돼
이브 생 로랑은 1966년 남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을 위한 턱시도 ‘르 스모킹(프랑스어로 턱시도란 뜻)’을 발표했다. 턱시도를 이브닝 드레스로 만드는 혁신적인 일을 한 것이다. 르 스모킹 스타일은 몸에 꼭 맞는 길이가 긴 재킷, 일자 스타일의 바지, 오건디(가볍고 투명해 보이는 빳빳한 촉감의 면이나 폴리에스터) 소재의 셔츠와 넥타이, 실크 소재의 벨트로 구성됐다.
이브 생 로랑은 르 스모킹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은퇴 컬렉션(2002년)까지 매 시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발표해 르 스모킹은 이브 생 로랑 디자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르 스모킹 스타일은 1960년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맞물려 클래식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샤넬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블랙 리들 드레스’가 있었다면 이브 생 로랑에게는 르 스모킹이 있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이브 생 로랑의 창조성을 높이 평가했고 이브 생 로랑 또한 샤넬을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꼽았다.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과 함께 성공한 뒤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프랑스 국립 파리 오페라단의 수장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였고 미술품 수집가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신문사 르몽드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그는 소장품 경매를 통해 얻은 7000억원에 이르는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이브 생 로랑과 베르제가 살던 바빌론가의 아파트에는 미술품과 오브제들로 가득 찼다. 베르제는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라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편집증 환자 같기도 했고 어떤 때는 폐소공포증 환자 같기도 했지만 서로에게 우리는 엄연한 수집가였다. 경매를 마치고 나면 그 병이 낫지 않을까 자문해 보곤 했다. 우리는 퐁스(발자크가 쓴 ‘인간희극’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가난한 음악가 퐁스가 사경을 헤매자 그가 평생 모은 골동품과 미술품이 고가의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안 주변인들이 이를 약탈한다는 내용)보다는 노아유 가문(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특히 마리로드 드 노아유 부인은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가로 유명하다. 주로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작품을 수집하고 후원했다)에 가까운 수집가들이었지. 노아유 가문은 막판엔 조잡한 초현실주의 그림들을 수집하긴 했지만 말이야.”
미술품 경매로 얻은 7000억원, 사회 환원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의 우수성에 대해 회고하듯 얘기를 이어 갔다. “너는 스스로가 일에 있어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디올·샤넬·발렌시아가가 너의 좌표 안에 있었고 네가 그들의 기록을 경신했지. 다음 세대의 디자이너들은 엄청난 도약을 이뤄 낼 거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 그 마음이, 바로 우리가 작품을 수집한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베르제는 미술품 수집이 이브 생 로랑과의 인연을 이어 온 매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 피카소나 마티스의 작품이 보인다고 놀란 적은 없잖아. 경매에 내놓은 733점의 작품이 실린 카탈로그를 볼 때면 현기증이 나. 미치광이의 소장품이 아닌가 싶어서. 정확히는 두 미치광이의 것들이겠지. 사실 작품 대부분을 사들인 책임은 내게 있는데, 도대체 그 많은 그림과 오브제를 모을 시간을 어떻게 낸 것인지 나 자신조차 의문스러울 정도야. 한편으론 우리가 취향을 두고 서로 맞선 적이 없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사실은 서로에게 건넨 가장 큰 사랑의 증거가 바로 이 컬렉션과 집이 아닐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언젠가 너는 말했지. ‘사람들은 노아유가의 안목에 대해 말하듯 베르제의 심미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될 거야’라고. 사실 너는 좀처럼 칭찬하는 법이 없는 데다 보통은 주인공을 자처하길 좋아했으니까. 가장 자주 그 자리를 내준 사람은 나였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 우리는 시작부터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은 분담했지. 너와 나는 각자의 역할을 늘 잘 알고 있었어.”
경매에서 앙리 마티스의 정물화 ‘노랑앵초, 푸른색과 분홍색의 테이블 보’는 3590만5000유로(약 700억원)에 팔렸고 이브 생 로랑이 희망했던 대로 고야의 작품은 루브르박물관에, 에드워드 번존스의 타피스리는 오르세미술관에 기증됐다. 경매에서 문제가 된 중국 두상들은 낙찰됐다.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북경의 황실정원에서 약탈해 간 것으로 알려진 십이지상 중 쥐와 토끼 두상 두점이 경매에 나오자 중국 정부가 경매 중지를 신청하고 반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 법원은 이미 서류상 소유권이 인정된 개인 자산이라는 이유로 기각했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참고 자료: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Franz)’
사진 : 인스타그램 museeysl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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