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하면 본보기 될라"..업계, 중대재해법 시행앞 긴장속 대비 분주
오너들 등기임원서 사퇴 사례도..유사시 책임 피하려는 '꼼수' 지적
(서울=연합뉴스) 산업팀 = 오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주요 기업들이 막바지 내부 점검에 나섰다.
이미 상당수 기업이 지난해 말부터 조직개편을 통해 안전 전담 조직을 신설하거나 기존 조직에 해당 업무를 맡기며 대비해왔으나 혹시 미흡한 점은 없는지 이중 확인을 하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사업 특성상 사고가 많은 건설 등의 분야에서 더욱 신경 쓰는 모양새다.
기업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만 중대 재해의 기준이 분명치 않은 상황이어서 법 시행 초기 혼란이 예상된다.
또한 법 시행과 함께 무더기 처벌 사례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 초기에 적발돼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대기업 앞다퉈 안전 콘트롤타워 세우고 내부 대책 마련
9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산업재해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징역형도 부과될 수 있다.
이에 대기업은 작년 말부터 조직개편과 해당 조직에 임원급 인사를 앉히며 '안전 관리'에 힘을 싣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조직 개편에서 '주요 리스크 관리 조직'(CRO)을 신설하며 전사적 위기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또 안전환경담당을 지정해 연초부터 중대재해법 시행에 대비하는 동시에 안전환경 보건방침도 새롭게 제정했다.
SK하이닉스도 조직 개편을 통해 '안전개발제조총괄'을 신설했다. 기존의 '개발제조총괄' 조직명 앞에 '안전'을 추가한 것이다.
이 조직의 수장으로는 곽노정 사장을 임명했다. 전사적 안전·보건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사장급 경영진에게 부여하면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11월 '최고안전관리책임자'(CSO) 직책을 새로 만들고 안전생산본부장인 고영규 부사장을 선임했다.
GS칼텍스도 지난해 말 CSO인 이두희 당시 부사장을 각자 대표이사로 승진시키며 권한과 책임을 강화했다.
포스코는 현장 생산과 안전의 중요성을 고려해 지난해 말 정기인사에서 상무보급 전체 승진 인원의 40%를 현장 출신으로 채웠다.
중대재해 경험 기업 "더 철저히 대비"…협력사 관리도 강화
과거 중대재해 발생 경험이 있는 기업은 사고 직후 당시부터 재발 방지 대책을 시행하는 등 법 시행을 앞두고 더욱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2020년 3월 충남 서산 대산공장 폭발사고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향후 3년간 안전환경 부문에 5천억원을 집중 투자하고 안전환경 전문가를 2배로 확대하는 내용의 안전환경 강화대책을 발표했다.
특히 중대 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는 경영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강도 높은 원칙을 세우고 구성원들에게 수시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화학물질 누출 사고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LG디스플레이도 사고 직후 4대 안전관리 혁신 대책을 내놨다.
이에 더해 후속대책으로 국내외 사업장 안전 총괄 역할을 하는 '최고안전환경책임자'(CSEO) 부사장을 선임했다.
2018년 12월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20대 비정규직 근로자가 혼자 근무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죽는 사고가 발생한 한국서부발전은 본사 안전조직을 사장 직속으로 승격시킨 동시에 태안과 평택발전본부에 현장안전팀을 신설하고 안전인력도 46명 보강했다.
기업들은 협력사에 대한 안전 관리도 강화했다. 협력사 직원의 산재 사고에 대해서도 원청업체의 경영진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매달 협력사 최고경영자(CEO)와 간담회를 열어 환경안전법규 동향 등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 작업중지권제도 활성화, 위험 예지 훈련 대회, 위험성 평가 교육 등을 진행하면서 협력사의 작업 현장 내 위험요인 제거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포스코는 협력사 상생협의회를 운영하며 월이나 분기별로 안전협의체를 가동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4월에는 제철소 설비 투자를 하면서 협력사의 안전 관련 의견을 수렴해 노후 설비 교체 등을 진행했다.
"처벌 1호 피하자"…건설 등 고위험업체 '긴장'
특성상 사고가 빈번한 고위험 산업계는 1호 처벌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더욱 긴장하는 모양새다.
건설업이 대표적이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산업재해 예방조치 의무 위반 사업장 1천243곳의 명단을 보면 건설업이 59%에 달했다. 또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중 사망재해자가 2명 이상 발생한 사업장의 71%가 건설업체였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일단 처벌 1호는 피하고 보자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따라 건설업계는 안전 강화를 위한 조직 개편 및 CSO 지정과 함께 주말이나 휴일에는 현장 운영에도 제한을 두고 있다.
한 대형건설사는 동절기 주말에는 작업 금지 원칙을 세웠다. 불가피한 현장에 대해서는 사업본부별 안전 대책을 수립·운영하도록 했다.
또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는 오는 27일을 '현장 환경의 날'로 지정해 정리 정돈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현장에 남길 계획이다. 이튿날인 28일에도 오전에는 안전 워크숍과 노사 협의체를 진행한 뒤 오후 현장 업무도 조기 종료할 예정이다.
주택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건설사들이 현장 특성상 사고 가능성이 큰 주말과 휴일의 안전관리 소홀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 체제도 변화…사고발생 시 책임 대비?
사고 발생에 대비해 법적 책임을 분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조직 개편도 눈에 띈다.
사주(오너) 경영인 체제인 호반건설의 경우 CSO를 선임하고 나아가 각자 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 밖에 많은 중견 건설사 사주들이 지난해 잇달아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에 나섰다.
경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사주가 안전사고로 처벌을 받는 사태를 막기 위해 유사시 책임을 CSO로 돌리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형 건설사의 임원은 "중대재해처벌법에 저촉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처벌이 CSO 선에서 끝날지, 아니면 CEO나 오너까지 올라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의 사전 조치를 하고, 조직 전반에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도록 경각심을 고취하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형 유통기업도 마찬가지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임박한 상태에서 취한 조치는 아니지만, 신세계그룹의 경우 정용진 부회장이 앞서 2013년에 일찌감치 신세계와 이마트의 등기임원에서 모두 사퇴한 상태이고,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 역시 미등기 임원이다.
롯데 신동빈 회장은 2020년 롯데쇼핑 등기임원에서 물러났다.
쿠팡의 김범석 창업자 역시 지난해 5월 한국 쿠팡의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는데 당시 이를 두고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런 가운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의 책임 범위는 물론 고위와 과실을 구분하는 기준 등에 대한 규정이 여전히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아울러 중대재해가 빈번한 50인 미만 기업은 법 적용이 2년 유예되고, 5인 미만 사업장은 제외돼 법 시행의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지난해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을 규모별로 보면 50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의 84%를 차지해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소규모 사업장이 유예 기간에도 안전사고 예방에 힘쓸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luc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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