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시진핑 시대 중국의 영어 대후퇴
최근 중국 베이징 지하철 2호선 베이징기차역(北京站 베이징잔)의 영문 표기가 ‘Beijing Railway Station(베이징 레일웨이 스테이션)’에서 ‘Beijing Zhan(베이징 잔)’으로 바뀌었다. ‘역’을 뜻하는 영어 단어 ‘station(스테이션)’이 중국어 병음(중국어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것)인 ‘잔(zhan)’으로 교체됐다. 7일 2호선 열차 내부 노선도에는 한자 아래, 영어로 ‘베이징 잔’을 먼저 쓰고 괄호 안에 ‘베이징 레일웨이 스테이션’이라고 쓰여 있었다. 급히 바꾸느라 새 병음 표기와 영어 번역 명칭을 하얀 스티커에 적어 임시로 붙여 놨다. 한창 교체 작업이 진행 중이라, 베이징기차역 지하철역 밖 출입구 표지판엔 옛 표기가 아직 그대로인 반면, 바로 옆 디지털 전광판엔 새 표기가 뜨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10·19호선의 무단위안(牡丹园)역의 영문 표기는 ‘Mudanyuan Station(무단위안 스테이션)’에서 ‘Mudanyuan Zhan(무단위안 잔)’으로 바뀌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아예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영문 표기가 바뀐 경우도 있다. 4·9호선 국가도서관(国家图书馆)역의 영문 표기는 ‘National Library(내셔널 라이브러리)’에서 ‘Guojia Tushuguan(궈자 투수관)’으로, 4호선 베이징대학동문(北京大学东门)역의 영문명은 ‘Peking Univ. East Gate(피킹 유니버시티 이스트 게이트)’에서 ‘Beijing Daxue Dongmen(베이징 다쉐 둥먼)’으로 바뀌었다. 중국어로 도서관이 ‘투수관’, 대학이 ‘다쉐’, 동쪽 문이 ‘둥먼’이란 걸 모르는 외국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하철역 영문 표기 변경은 중국 온라인에서 상당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외국인에게 혼란만 일으킨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베이징지하철공사는 지난달 24일 “관련 규정에 따라 일부 역에서 먼저 교체가 이뤄졌으며, 앞으로 모두 통일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논란은 계속됐다. 관영 광밍일보까지 나서 “중국인은 병음을 볼 필요가 없고 영문 표기가 필요한 외국인은 봐도 이해를 못하는데, 세계화 시대에 퇴행적인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영문 표기법 교체는 올해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최를 불과 몇십 일 앞두고 진행 중이다. 동계올림픽과 관련이 있는 조치인진 확실치 않다. 다만 일각에선 14년 전인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개최 당시 중국 정부가 틀린 영번역 바로잡기 캠페인을 벌이고 영어 배우기 열풍이 일었던 것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데 주목한다. 영어는 시골 영어 교사였던 마윈이 알리바바를 창업하고 중국 최고 부자가 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많은 중국 젊은이가 마윈의 성공 신화를 보며 영어를 배웠다.
한때 중국 최고 지도부도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2000년 미국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링컨의 게티스버그연설을 읊었다. 리커창 현 총리는 2013년 홍콩대학에서 연설 중 영어를 쓰기도 했다. 리 총리가 1970년대 후반 베이징대에서 법 공부를 할 때 영어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외우고 영어 원서를 중국어로 번역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시진핑 시대 중국에서 영어는 배격 대상이 됐다. 중국공산당은 영어를 서구의 ‘나쁜’ 사상을 퍼나르는 유해물로 취급한다. 중국 서점에서 영어 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 중국 교육부는 초·중등 학교에서 외국 교과서 사용을 금지했다. 올해 8월 상하이시는 초등학교에서 영어 시험을 없앴다. 올해 7월엔 중국 전역에서 영어 사교육이 금지됐다. 지금 중국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배운다. 시 주석은 올해 3월 “5000년 역사의 중국 문명”을 강조하며, 문화 자신감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 최고 정치 자문 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인 쉬진은 지난해 3월 영어를 필수 과목에서 제외하고 대학 입학 시험에서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미 중국공산당은 국민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는 온라인 창구를 막아놨다. 인터넷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을 쌓아 유튜브, 페이스북 등 외국 웹사이트 접속을 차단했다. 14억 중국인 중 상당수가 유튜브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올해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3연임을 앞두고 중국이 세계와 단절하며 더 멀어지고 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텅 빈 채 그저 달리네… 당신이 겪는 그 증상의 이름은 ‘시들함’
- 中, 석화단지 또 증설 완료… 갈수록 심화하는 중국발 공급과잉
- [2024 연말정산]⑥ 10일 남은 2024년… 막판 절세 포인트는?
- [정책 인사이트] 스크린 파크 골프장·PC방·건강관리실로 변신하는 경로당
- [시승기] 비·눈길서도 돋보이는 ‘포르셰 911 카레라’
- 무너진 30년 동맹…퀄컴, ARM과 소송서 승소
- “탄핵 시위 참가자에 음식·커피 주려고 내 돈도 보탰는데 별점 테러” 자영업자들 하소연
- 中에 신규 수주 밀린 韓 조선… “효율·경쟁력은 더 높아져”
- 치솟는 프랜차이즈 커피값에… ‘한 잔에 500원’ 홈카페 경쟁
- 늦은 밤 소주잔 기울이며 직원 애로사항 듣는 김보현 대우건설 사장, ‘사람’과 ‘소통’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