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탈모와 대통령 선거
뜻밖의 흥행이었다. 느닷없이 대선 정국의 빅이슈로 떠오른 '탈모 공약' 이야기다. 먼저 불을 지핀 건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였다. 이 후보 측이 지난 4일, 탈모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자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큰 호응이 일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까지 참전하면서 판이 커졌다. 이 후보 측은 바로 그날 "이재명은 뽑는 게 아니라 심는 겁니다"는 내용의 14초짜리 짧은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 물 들어올 때 노 제대로 저었다. 민주당의 장기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포퓰리즘 논란도 일었다. '모(毛)퓰리즘', '털퓰리즘(털+포퓰리즘)' 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원으로 탈모를 지원하는 게 합당하냐는 지적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난 2014년 동아일보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희귀난치성질환자 515명의 진료비 명세서를 분석한 결과 희귀난치성질환자들은 수술이나 입원 치료를 한 번 받을 때 비급여 진료비를 292만 원 이상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이 없어 치료 못 받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기적의 신약'으로 불리는 한 폐암 치료제는 1년 복용 비용이 1억 원에 육박한다. 당연히 건강보험은 적용되지 않는다. 2020년 우리나라 건강보험 보장률은 65.3%로 OECD 평균 80%에 크게 못 미친다. 더 급하고 위중한 질병부터 지원하는 게 맞지 않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드름 치료, 임플란트 같은 비급여 치료와 형평성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어진다.
'뜻밖의 흥행'에는 이유가 있다.
'모(毛)퓰리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기자는 이번 대선 정국의 '탈모 논란'이 꽤나 의미 있는 이슈라고 생각한다. 정치가 이념이나 진영이 아닌, 개인의 행복권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다. 그동안 거대 양당이 주도하는 한국 정치는 소수의 다양성이나 개인의 행복권보다는 주로 기득권의 이익이나 큰 집단의 대표된 목소리에 많이 치우쳤던 게 사실이다. 평범한 다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도 있긴 했지만 탈모 같은 고민은 대부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곤 했다. 기득권을 대표하는 '그들만의 정치' 속에 탈모 같은 이슈가 설 자리는 없었다. 반려견 공약 같은 생활밀착형 공약이 있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탈모 공약 논의는 정치가 방 한 구석에 쪼그려 낙담해있는 개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모(毛)퓰리즘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는 일이다. 정치인의 약속이 공수표가 될 때는 주로 눈앞의 표만 보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때다. 일부 정치인들처럼 "재원은 충분하다"고 우기기만 할 게 아니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와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건강보험 급여보다 다른 현실적인 방법도 여럿 거론된다. 안철수 후보는 복제약을 예로 들며 약값 인하를 언급하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혹시 있을지 모를 업계의 담합 등 가격 결정 구조만 개선해도 약값이 많이 낮아질 거라는 의견도 나온다. 방법을 찾는 건 이제 정치인들의 몫이다. 천만 탈모인들을 두 번 울리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탈모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정치는 많은 것을 바꾼다. 주 5일제가 도입된 것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생긴 것도 결국 정치가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그동안 개인의 행복보다도 지배 세력의 도그마와 그들만의 논리에 의해 움직여 온 측면이 크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 결과는 때때로 시민에게 행복보다 불행을 안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 또 한 번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번만큼은 거대 담론보다 개인의 삶에 보다 관심을 갖고 사회 전체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치가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탈모가 아니라도 개인의 행복과 관련된 문제는 얼마든지 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도 좋다. 공약만큼은 호감일 수 있지 않은가.
강청완 기자blue@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1,980억' 횡령 직원 구속…남은 금괴 어디에
- '노 마스크' 생일파티…홍콩 고위급 인사들 무더기 격리
- 화이자 '먹는 치료제', “내주 복용 가능 계획”
- “배설물 툭툭툭” 떼까마귀 도심 출몰…늘어나는 피해
- “여가부 폐지” vs “여가부 강화”…급부상한 '젠더 이슈'
- 카자흐 시위대에 “조준 사격” 승인…미, 자국민 철수
- 철이 없었죠, 서운해했다는 게…'종신 기아' 양현종,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초등학생들과 또래 폭행한 여중생, 출동 경찰관도 폭행
- 판사가 살인 무기수와 키스?…교도소 CCTV에 딱 걸렸다
- 중국 로버가 달 뒷면서 포착한 '신비한 작은집', 알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