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권력으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일구는 마술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 1.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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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4회>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한 장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https://www.rfa.org/mandarin/yataibaodao/renquanfazhi/nu-12312018103827.html>

신화 속 사흉(四凶), 자애로운 제왕의 자식들로 그려진 이유

중국 고대신화에 네 마리 흉측하고 포악한 괴물(怪物)이 등장한다. 혼돈(混沌), 궁기(窮奇), 도올(檮杌), 도철(饕餮)이 그들이다. 놀랍게도 이들 네 괴물 중에서 혼돈, 궁기, 도올은 상고 시대 성스러운 제왕(帝王)의 자식들이었다. 가령 <<춘추(春秋)>><문공(文公)>18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신화에서 흔히 황제(黃帝)와 동일시되는 제홍씨(帝鴻氏)에겐 어리석은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날마다 못된 짓을 일삼아서 천하의 사람들이 그를 혼돈이라 불렀다. 황제(黃帝)의 장자라 알려진 소호씨(少皞氏)에게도 덜떨어진 자식이 있었는데, 신의를 훼손하고 성덕(盛德)을 모함해서 천하의 사람들이 그를 궁기라 불렀다.

오제(五帝)에 꼽히는 전욱씨(顓頊氏)도 미욱한 자식을 두었다. 가르쳐도 소용이 없고,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들었다. 충고를 해도 완악해서 듣지 않고, 내버려두면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오만하고 방자해서 명덕(明德)을 해치고 하늘의 상도(常道)를 어지럽혔으니 천하 사람들이 그를 ‘도올’이라 불렀다. 황제(黃帝) 밑에서 하관(夏官)을 역임했던 진운씨(縉雲氏)의 자손 중에 사치향락에 탐닉하고 재물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자가 있어 천하의 사람들이 ‘도철’이라 불렀다.

<중국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사흉(四凶)의 상상도. 왼쪽부터 혼돈, 궁기, 도올, 도척. 그림은 산해경(山海經) 등에서 발췌.>

혼돈과 도철은 악행(惡行)으로 천하의 질서를 깨뜨리고, 궁기와 도올은 악언(惡言)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흉신(凶神)들이었다. 지혜롭고 자애로운 요(堯)임금도 이들을 제거할 수 없었는데, 어질고 너그러운 순(舜)임금이 권좌에 오른 후에야 이들 네 흉족(凶族)들을 멀리 변방으로 내쳤다고 한다. 고대의 신화 속에서 이 흉악한 괴물들이 가장 현묘(玄妙)하고도 자애로운 상고 시대 제왕(帝王)의 자식들로 그려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권력 세습의 위험에 대한 경종...자식의 부정 막을 수 없음을 강조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 1875-1961)은 모든 신화는 전체로서의 인류가 무의식적으로 터득한 심오한 지혜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대의 신화 작가들은 오제(五帝)의 위업과 사흉(四凶)의 패덕을 대비시킴으로써 통해 권력 세습의 위험에 경종을 울렸다고 볼 수 있다. 성왕들조차도 친자식의 비위(非違)와 부정(不正)을 제대로 막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융의 설명대로라면 전제적인 세습 권력에 대한 인류의 집체적 공포가 사흉의 이야기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권력 승계는 중국정치사의 중대한 이슈였다. <<상서(尙書)>>의 요(堯)는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보다는 인덕이 높은 순(舜)을 선택하여 권력을 선양(禪讓)했다. 순 역시 세습을 거부하고 치수의 영웅 우(禹)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고대(古代)의 식자들이 왕권(王權)의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세습제의 폐해를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자 주변에는 언제나 그 권력을 슬쩍 훔쳐서 사리사욕을 채우려 날뛰는 “호랑이 무리”가 어슬렁거리고, “파리 떼”가 들끓어왔기 때문이다. 멀리 볼 필요 없이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공중앙 최고 영도자들의 직계 자식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바로 그 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혁명 원로의 자식 세대 ‘홍얼다이’, 관권 부패를 주도

1989년 5-6월 톈안먼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외친 구호 중에 “관다오(官倒)를 타도하라!”가 있다. 여기서 “관다오”란 관권 투기를 의미하는 1980년대의 속어다. 이 구호 속엔 권력형 부정비리를 규탄하는 민중의 분노가 서려 있다. 개혁개방이 추진된 지 불과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개방의 물결을 타고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뤄지던 그 10년 동안 도대체 누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관다오”를 하고 있었다는 말일까?

혁명 원로의 자식 세대를 보통 “홍얼다이(紅二代)”라고 한다. 홍얼다이는 문혁 시절 고위 간부의 자제들을 이르는 속어였는데, 통상적으로 태자당(太子黨)과 대동소이하게 사용된다. 개혁개방 직후부터 바로 그 홍얼다이가 “관다오”를 주도했다. 1980년대의 사례를 몇 개만 살펴보면······.

<“관다오를 타도하라!” 관다오란 관권 투기를 이른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한 장면/ https://twitter.com/ChenYingJun_KM/status/478594224196034561/photo/1>

사례#1: 덩푸팡(鄧樸方, 1944- )은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의 장남이다. 문혁 시절 덩푸팡은 홍위병에 폭행을 당하다가 4층 건물에서 추락한 후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겪어야만 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1984년 그는 장애인 기금 조성의 명분으로 “중국 캉화(康華) 발전공사”(이하 캉화)라는 무역공사를 창건했는데, 곧 태자당 멤버들이 대거 모여들어 이 공기업을 장악했다. 많을 때는 200명이 넘는 태자당 멤버들이 핵심 부서들을 도맡았다. 캉화를 거쳐서 정부의 요직으로 진출한 인원도 적지 않았다. 1988년 “관다오”를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국무원은 국영 기업체의 부패와 불법거래를 조사했고, 캉화는 결국 미화 3백만 달러의 벌금형을 받고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89년 8월 말 <<인민일보>>는 캉화의 해체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바로 그해 6월 “톈안먼 대도살”을 자행한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중공중앙의 극한 조치였다.

사례#2: 1979년 외자유치를 위해 룽이런(榮毅仁, 1916-2005)은 덩샤오핑의 승인을 얻어 “중신 그룹(이하 CITIC)”을 설립했다. 중신그룹은 현재 세계 500대 기업에 속하는 중국 최대의 국영 기업체이다. 1980년대부터 이 회사의 실무는 왕전(王震, 1908-1993)의 아들 왕쥔(王軍. 1941-2019)과 룽이런의 아들 룽즈젠(1942- )이 맡았다. 인민해방군의 개국 상장(上將, 중장) 출신으로 덩샤오핑 시대 “8대 원로”에 꼽혔던 왕전은 국무원 부주석(1975-1980)에 이어 국가 부주석(1988-1993)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1989년 톈안먼 시위의 무력진압을 주도했던 보수파 중 한 명이었다. 중공중앙 보수파의 영수가 그 아들에게 황금알 낳는 거위를 쥐어준 셈이었다. 1996년 당시 왕쥔은 “중신 타이푸(泰富, 이후 중신 증권)” 주식의 18%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2009년까지 실권을 행사해서 결국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홍이대”의 반열에 올랐다. 2006년 왕쥔이 중신 그룹을 떠난 후, 역시 태자당에 속하는 콩단(孔丹, 1947- )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콩단의 부친은 중국공산당 조사부 부장 콩위안(孔原, 1906-1990)이었고, 그의 모친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의 개인비서였다. 태자당원에서 태자당원으로 이어지는 치부(治富)의 회로를 볼 수 있다.

사례#3: 1984년 인민해방군 무기 공장으로 출발해서 1992년 창립된 “중국 바오리(保利) 그룹”(Poly Group) 역시 초기부터 중국공산당 영도자들의 친인척이 장악한 대표적인 공기업으로 유명하다. 덩샤오핑의 사위 허핑(賀平, 1946- ), 중국공산당 총서기(1987-1989)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의 사위 왕즈화(王志華, ?- ), 국가주석(1988-1993) 양상쿤(楊尙昆, 1907-1998)의 사위 왕샤오차오(王小朝, 1953- )가 이 회사에 임원으로 참여했다. 문혁 때 옥사한 대원수(大元帥) 허룽(賀龍, 1896-1969)의 아들 소장 허펑페이(賀鵬飛, 1944- )도 모종의 커넥션을 타고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덩샤오핑에게 묻습니다! 우리 아이는 양식이 떨어져서 굶고 있어요. 당신의 아이는 지금 뭐하고 있소? 학생 가장”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의 모습/ https://m.soundofhope.org/post/309521>

정치 권력 이용해 특혜 누리며 천문학적 거부 일궈

요컨대 1980년대 중공중앙의 혁명 원로들은 직계 가족 및 친인척을 통해서 막대한 재산을 만들었다. 공기업에 자식들을 심어서 돈을 끌어 모으는 데 있어선 보수파와 개혁파,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기민하고, 과감하고, 저돌적이었다. 중공중앙의 영수들에게 “개혁개방”은 그들이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해서 획득한 막강한 정치권력을 막대한 재력(財力)으로 급속하게 전환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중공중앙의 영도자들은 치부(致富)의 마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89년 톈안먼 대도살 이후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江澤民, 1926- ), 1989년 5월 20일 베이징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국무원 총리 리펑(李鵬, 1928-2019 ),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장쩌민을 이어서 중공 공서기를 역임한 후진타오(胡錦濤, 1942- )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자식들은 부친의 임기 동안 정부의 특혜를 독점적으로 누리며 천문학적 거부를 일궜다. 이제 그 파란만장하고도 신묘불측한 축재(蓄財)의 과정을 살펴보자. 고대의 성왕은 네 마리 괴물을 낳았고, 중공의 혁명 원로는 태자당을 낳았다.<계속>

<“민주는 우리들 공동의 이상이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한 타이완 기자의 사진/ https://www.twreporter.org/a/photo-tiananmen-june-fourth-incident-30-sieh-san-tai-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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