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호두야, 다음에는 오랜 친구가 되자

정우열 2022. 1. 8.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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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쯤이면 제주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다.

호두가 죽은 지 며칠 뒤, 뒷집 부부는 마당 한가득 상자에 귤을 포장하고 있었다.

마당에 나갈 때마다 한두 개씩 귤을 까먹으며 호두 생각을 한다.

평상에 앉아 귤을 까면서 호두야, 호두야- 하고 괜히 이름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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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인의 오후] '짝이 되는 동무.' 반려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입니다. 고양이, 개, 식물 등 짝을 이뤄 함께 살아가는 반려인들의 단상을 담았습니다.
붙임성이 좋았던 호두. 이름을 부르면 다리에 몸을 비벼댔다. ⓒ정우열 제공

혹시 귤 좀 가져 가실래요? 아뇨, 저희 집에도 이미 너무 많아서….

이맘때쯤이면 제주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다. 제주도에 살면서 귤을 사먹는 사람은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겨울철 제주도에는 가게마다 입구에 커다란 귤 바구니가 놓여 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설마 이거 공짜로 먹으라는 건가 의심하기도 하고 몇 개까지 집어 가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기도 하는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괜찮다.

호두는 뒷집 고양이다. 현재까지 내가 파악한 바로 뒷집에는 고양이 둘, 개 하나가 반려동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고양이는 각각 호두와 땅콩, 개는 일락이, 혹은 일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셋의 공통점은 모두 동네를 자유롭게 쏘다닌다는 점이다. 셋이 뭉쳐 다니는 건 아니고 각자 개인플레이다. 요즘 대도시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사는 제주도 하고도 서귀포에서는 옛날식으로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를 보는 일이 그리 드물지는 않은 편이다.

불러도 평소처럼 오지 않더니…

호두는, 붙임성이 썩 좋은 편이었다. 어쩐 일인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우리 집 마당에서 일광욕을 즐겨 하고 있었는데, 조금 얼굴을 익히고 난 후부터는 호두야, 하고 부르면 짧게 냥- 하고 답하면서 다가와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댔다. 손을 뻗으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발라당 뒤집은 채로 그릉그릉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일단 쓰다듬기 시작하면 끝을 몰라서, 일이 바쁠 때는 호두와 마주치는 게 조금 귀찮기도 했다.

몇 주 전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수영장에 다녀와서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뒤에 세워져 있던 차 아래 호두가 누워 있었다. 호두야, 하고 불러도 평소처럼 다가오지 않고 누운 그대로였다. 장난을 치자는 건가 싶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을 찍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호두가, 죽어 있었다. 기분 좋게 그릉대던 때처럼 몸을 뒤집은 채로,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매우 말끔해 보이는 상태였다. 마침 뒷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호두가 든 상자를 뒷집 가족들에게 건넨 것은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귤 좀 드려. 응, 아니 이거 말고 더 좋은 걸로 드려야지. 호두가 죽은 지 며칠 뒤, 뒷집 부부는 마당 한가득 상자에 귤을 포장하고 있었다. 호두가 죽은 이유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호두는 다섯 살쯤 되었고, 두 번의 파양을 겪은 후 뒷집에 입양되었다는 걸 그때 들었다. 호두 잘 수습해주셔서 고마워요. 안 그랬음 차에 깔려서 망가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호두는 왕할머니 무덤가에 묻어줬다고 했다. 상냥한 인사는 나도 고마웠지만 귤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냉장고에 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사양이 더 어려운 법이다.

다음 날 아침 대문 앞에는 귤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호두가 자주 일광욕을 하던 계단 옆에 그걸 옮겨놓았다. 마당에 나갈 때마다 한두 개씩 귤을 까먹으며 호두 생각을 한다. 아직도 어디선가 냥- 하며 나타나 몸을 비벼대줄 것만 같은 착각에 자꾸만 빠진다. 뒷집의 ‘좋은 귤’은 올겨울 얻은 귤 중에 제일 맛있다. 적당히 새콤하고 매우 달아서 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지만 보나마나 모두들 사양할 것이다. 평상에 앉아 귤을 까면서 호두야, 호두야- 하고 괜히 이름을 불러본다.

정우열(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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