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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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문·출판쟁이들이 골머리를 앓는 표현이 있다. 바로 여성을 가리키는 대명사 ‘그녀’다. 신문이나 책에서 ‘그녀’라고 쓰는 날이면 당장 따가운 눈초리를 각오해야 한다. 예전에는 일본어 ‘가노조(彼女)’의 잔재라는 이유가 컸다.
하지만 최근에 ‘그녀’가 질타의 대상이 된 속사정은 따로 있다. 양성(兩性) 평등이나 정치적 올바름에서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이다. 남성들은 당당히 ‘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성들은 굳이 ‘여(女)’자를 덧붙여 ‘그녀’라고 지칭하는 데에 대한 반발이다. ‘여배우’ ‘여의사’ ‘여지휘자’라는 표현을 꺼리는 것과도 흡사하다. 일리가 있다. 남성을 ‘남배우’ ‘남의사’ ‘남지휘자’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영어와 프랑스어에서도 비슷한 논쟁은 일어난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일(il)’과 여성 대명사 ‘엘(elle)’ 대신에 남녀 구분이 없는 ‘이엘(iel)’을 사용하자는 주장이 불거졌다. 성 중립성을 표방한 이 신조어는 최근 불어 사전 ‘르 프티 로베르’ 온라인판에도 등재됐다. 사전 총괄 책임인 샤를 벵브네는 “현재 진행 중인 프랑스어의 변화를 관찰하는 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프랑스어는 사람뿐 아니라 사물을 일컫는 명사에도 남녀 구분이 있다. ‘하늘(le ciel)’은 남성이요, ‘땅(la terre)’은 여성으로 칭한다. ‘해(le soleil)’는 남성이지만 ‘달(la lune)’은 여성이다. 이 구분을 허무는 순간, 문법과 발음에도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다. 한국어의 경우가 미풍(微風)이라면, 프랑스어는 그야말로 폭풍에 가깝다.
사정이 이쯤 되자 프랑스 교육부 장관인 장 미셸 블랑케가 ‘이엘’이라는 낯선 대명사에 대해 잔뜩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프랑스어를 인위적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통령 부인 브리지트 여사도 “우리의 언어는 아름다우며 그(il)와 그녀(elle)라는 두 대명사가 있을 뿐”이라고 지원 사격을 했다. 실제로 그는 불어·라틴어 교사 출신이다.
언어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논란이 불거지는 건 이중적 속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거울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규칙을 정하는 잣대 역할도 한다. 이런 양면성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직종이 언론과 출판이다. 촌각을 다퉈서 신조어를 소개하면 ‘정체불명 외래어를 남발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반대로 새로운 단어의 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유행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처럼 기자와 편집자는 언어의 파괴자와 수호자 사이에서 평생 줄타기하는 존재다. 그런 직업적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미 잡지 ‘뉴요커’의 전 교열 책임자 메리 노리스가 쓴 ‘뉴욕은 교열 중’이다. 1978년 입사 이후 30여 년간 이 잡지에 몸담았던 그는 지면 통과 권한을 쥐고 있어서 ‘쉼표의 여왕(comma queen)’으로 불렸다. 노리스는 이 책에서 고백한다. “사실 나는 교열자로서 보수주의자의 편”이라고. “먼 훗날 ‘뉴요커’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문법에 맞는 것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언어의 변화와 수호라는 갈림길에서 최종적으로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단어의 든든한 교과서는 사전이고, 요긴한 참고서는 국립국어원 규정이다. ‘그녀’가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 한, 이 대명사를 당장 추방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하지만 퇴출 압력이 거세질수록 ‘그녀’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과연 21세기에도 ‘그녀’는 무사히 살아남을까. ‘그녀’의 운명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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