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노동계급의 책장
[경향신문]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면 가장 먼저 책장에 시선을 빼앗긴다. 책장에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찬찬히 헤아린 후에야 다른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년 시절부터 생긴 버릇이다.
그 시절 놀러간 친구들 집에는 교과서와 학습지가 놓인 작은 책장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에는 큰 서점이 없었고 작은 서점의 매대는 학습지로 가득했다. 유년기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작은 세계인지 알지 못했고, 작은 책장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것이 내가 나고 자란 산업도시 울산의 풍경이었다. 처음으로 부산과 서울의 큰 서점을 방문했을 때 느낀 충격과 희열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가 모르는 훨씬 큰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 도시에서 내가 독서를 취향으로 지니게 된 것은 조금은 유별난 일이었을 터이다. 사회문제에 관심 갖고 얘기하길 좋아하는 기질도 드문 것이었다. 내가 친구들과 달랐던 건 아마도, 집에 큰 책장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교과서나 학습지가 없었고, 나의 책이 아닌 부모가 보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특히 아버지의 책들이 많았다. 그는 이름 없는 평범한 고졸 출신의 노동자다. 젊은 시절 울산에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고, 평생을 일터에서 노동자로, 별다른 직위 없는 현장 활동가로 살았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기만 했던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라는 이름 아래 간절한 염원을 모았다. 그들은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소중한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왜 부당한지 조리있게 비판할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장에서 관리자와 일상적으로 부딪혔기에 사측의 주장을 반박할 논리를 준비해야 했다. 정치나 사회 문제가 노동자의 삶과 직결돼 있음을 알았기에 세상을 알아야 했다. 그렇게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할 언어를 열망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곧 큰 책장이 필요해졌다. 먼 훗날 그것은 노동계급의 자식인 나의 지적 세계를 형성한 바탕이자 문화자본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모 찬스의 불평등에 대해 지적한다. 부모 찬스는 부모의 경제적 수준 그 이상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의 대학 리포트 작성을 도울 수 있지만,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관공서의 공문을 설명해달라 부탁해야 한다. 부모의 학력과 학벌, 문화적 교양 수준, 인맥과 정보력, 그리고 책장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삶의 수많은 영역에서 발견되는 문화적 격차는 사람이 사는 지적 세계의 크기를 결정한다. 계급에 따른 문화자본의 차이는 세상의 다양한 일들에 대해 갖는 호기심,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지적 열망,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하기 위한 언어적 자원에서 격차를 만들어낸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할 언어를 필요로 하지만, 부모 찬스에 따른 문화자본의 차이는 더욱 커져만 간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난다해도 그 격차를 메울 수 없는 시대이다. 하지만 어떤 시대이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용기 내어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하며 언어를 갖기 시작한다. 그 간절한 용기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이윽고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책장이 된다. 거기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지적 유산이 있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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