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두 사람은 TV 토크쇼에도 출연하고 백악관도 방문해 닥칠 재앙을 경고하지만, 오히려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그들의 학교가 명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혜성을 파괴할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며, 이윽고 혜성이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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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백함도 부인하는 확증편향
우리 분노가 그런 건 아닌지
증오는 뜨거운 석탄 쥐는 것
호시우행하는 한 해 되기를
」
여기서 정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다. 명백한 과학적 사실에도 혜성의 접근을 부인하던 무리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라(don’t look up)’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 위험마저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확증편향’의 가공할 힘이다.
영화의 결말은 설명이 필요 없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돈룩업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을 되새겨보는 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것일 터다.
모바일 환경의 정보 과잉 시대는 확증편향을 그야말로 일상으로 만든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닿는 정보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래서 더 편향되고 더 확신이 굳어진다.
우리가 익히 경험한 대로 확증편향은 흔히 패거리주의와 짝을 이뤄 종말론적인 아집과 독선을 낳는다. 사무실 PC를 빼돌리는 장면을 보면서 “증거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해설을 할 수 있는 게 그래서다.
일단 편이 갈라지면 우리 편은 팥을 쒀도 메주가 되고, 상대편은 흰옷을 입어도 검게 보인다. 이해득실의 판단만 있을 뿐, 진실을 보려는 노력은 성가시다. 상대가 아무리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도 조작이요 거짓일 뿐이다.
싸움이 시작되고 상대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이제 필연이다. 시퍼렇게 날 선 말들이 오가고 육두문자가 춤을 춘다. 그러다 고소 고발로 이어지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다 다툼의 원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삿된 감정싸움만 남는다. ‘코삼비 계곡의 승려들’처럼 말이다. 부처가 코삼비에 머물 때 불법(佛法)의 해석을 놓고 두 비구 그룹이 다퉜다. 보다 못한 부처가 싸움을 멈추라고 말하자 승려들이 부처에게 말했다. “세존은 빠지세요. 우리 일입니다.”
정치적 목적이 끼어들면서 분노와 증오는 맹목적이 된다. SNS에 한마디씩 던지며 찍는 좌표에 따라 대중들의 분노는 이리 쏠리고 저리 달려간다. 90년 전 괴벨스가 히틀러를 위해 한 짓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말했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프로파간다의 가장 큰 적은 지성주의다.”
이런 싸움은 대부분 파국을 맞고서야 끝나게 마련이다. 425년 전 첫 출간된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그렇다. 사람은 바뀌지 않고 인간사 역시 늘 그 모양이다. 숱한 오해와 옥생각이 중첩되는데, 분노와 증오가 너무 짙어 진실의 바탕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때는 화해라도 했다. 그 화해가 얼마나 지속할는지는 몰라도 화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인스턴트 분노의 시대에는 화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분노와 증오의 통조림을 따서 오븐에 넣고 끓인 뒤 맛을 보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새 통조림을 딸 준비를 한다. 화해가 자리할 틈이 없다.
처음부터 분노와 증오의 싹을 잘라야 하겠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증오할 일이 왜 없겠냐마는, 자칫 소비되고 버려지는 게 분노하고 증오했던 나 자신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나한테 화가 미치는 까닭이다. 『법구경』이 말하는 게 그것이다. “증오를 품는 것은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을 집어 드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다른 이에게 던진다 하더라도 나 먼저 데고 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괴벨스한테 배우면 되겠다. 선전 선동의 천재 괴벨스가 스스로 약점을 고백하지 않았나 말이다. ‘지성주의’가 별 게 아니다. 화를 내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하는 게 지성이다. 우리 편이 뭐란다고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는 게 지성주의인 것이다.
그것이 곧 나를 위한 길이요 우리 편을 위한 길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한 길이다. 2022년 새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해가 됐으면 좋겠다. 호랑이해에 비춰 말하자면 ‘호시우행(虎視牛行)’이다. 판단은 호랑이처럼 냉정하게 하고, 행동은 소처럼 우직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동안 우직하게 믿고 사납게 행동하는 우시호행, 즉 돈룩업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말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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