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시대 거스르는 과잉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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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업문화 다른데 ‘노동이사’만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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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5단체 “충분한 논의 없이 강행”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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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앞 입법중단하고 공공개혁 함께 풀어야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중국 고사다. 남쪽의 귤을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되는 이치는 귤 탓이 아니다. 남과 북의 토양과 기후가 달라서다. 정치권의 입법 폭주 논란을 부른 공공기관 노동이사제가 꼭 그렇다.
노동이사제의 원조인 독일은 사회적 합의주의인 코포러티즘(corporatism)이 발달했다. 노사정(勞使政) 협의처럼 노동조합·경영진·정부가 임금과 근로조건 등 노사 문제를 합의하고 조율하는 시스템이다. 오랜 협력적 노사문화로 협상하고 조율하며 타협하는 데 익숙하다. 강력한 정치투쟁에 이골이 난 한국의 노조와는 많이 다르다.
역사적 배경과 기업문화가 이처럼 다른데도 노동이사제만 떼어내 한국에 이식하려 하니 무리가 따른다. 경제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법안이 5일 국회 기획재정위를 통과했다. 법사위를 거쳐 11일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경제5단체는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공감대 없이 강행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추가적인 입법 절차 중단을 국회에 요청했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가 왜 문제인가. 첫째, 지금도 강력한 공공부문 노조에 더 힘을 실어줄 것이다. 이미 노조에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젠 아예 뒤집어졌다는 낙담이 나오는 이유다. 공공기관에선 새 기관장이 올 때마다 노조가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고, 신임 기관장이 노조 요구를 뒷방에서 수용하는 일이 거듭된다. 기관장이 노조 눈치나 보는 ‘노영(勞營)기업’이 될 것이란 걱정이 나온다.
둘째, 공기업 개혁이나 구조조정이 어려워진다. 자산 2조원 이상 38개 대형 공공기관 중 이자도 못 갚는 공기업이 19곳에 달한다. 노동이사는 기업의 생존이나 주주이익, 공익보다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개선을 우선시할 것이다. 사업장 이전이나 인수합병 등 경영상 합리적 판단과 충돌하고 공기업 민영화나 공기업 간의 통합도 힘들어진다.
셋째, 경영 효율성이 떨어질 우려가 크다. 이사회가 과감하고 신속한 조치를 못 하고 이사 간의 발목잡기식 토론으로 실기(失期)할 수 있다. 비공개 이사회에서의 발언과 진행 내용이 노조에 전달되면 노동이사나 비노동이사에 대한 인신공격과 사퇴요구 등 갈등이 생기고 정치투쟁이 격화될 수 있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도입하려는 건 정치적인 이유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한국노총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를 함께 추진하기로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맺었다.
친노조 행보를 이어온 여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동개혁과 일자리 창출을 강조해온 국민의힘의 변심은 두고두고 논란이 될 거다. 윤석열 후보는 한국수력원자력을 예로 들며 “이사회에 노동이사가 있었다면 일자리가 없어지는데 탈원전에 찬성했겠느냐”는 설명이다. 그야말로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일이다. 정부의 공기업에 대한 불순한 압력이나 낙하산 인사를 막는 순기능이 이제까지 지적한 역기능과 비교될 수는 없다. 적어도 야당이라면 공공기관부터 연공서열에 의한 호봉제를 없애고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정책패키지라도 함께 내야 한다.
노동이사제 도입은 기업 자율에 맡기는 게 옳다. 기업 활동의 자유와 노사 자치는 헌법적 가치다. 기업에서 경영 의사결정의 자율성은 최대한 보장돼야 하며, 노사문제는 가능한 한 기업 내 노사 당사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국가 개입은 필요한 최소에 그쳐야 한다. 법으로 강제하는 노동이사제는 시대를 거스르는 과잉입법으로 임대차 3법처럼 후유증이 클 것이다. 충분하게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않고 선거판에 졸속으로 법을 통과시켜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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