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아침에 15분, 저녁에 15분

2022. 1. 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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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의 팍팍한 삶 주인공들
꿈에 대한 꾸준한 열정 화두 던져
새해도 소설 읽고 쓰는 일상 지속
타인의 삶 관심 기울이며 살리라

해마다 새해 첫날을 보내는 자신만의 습관이랄까 방법이 있을 것이다. 외출하지 않은 채 하루를 집에서 조용히 보낸다거나 영화관에 간다거나 하는. 나는 1월 1일이면 어머니와 떡국으로 점심을 먹고는 구독하는 일간지들과 어머니가 아침에 특별히 사온 다른 신문들을 들고 작업실로 간다. 그러곤 책상에 앉아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특별 지면들을 탐독하면서 새해 첫날을 보낸다. 글을 쓰고 가르치는 직업상, 여러 장르 중에서도 단편소설은 더 공들여 읽는 편이다. 신인 작가의 등단작에 스민 열정과 감각, 단편 속에 응축해낸 이 시대의 삶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시간. 그러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다. 찐 고구마나 떡 몇 개로 간단히 상을 차려 술 한잔 하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단편소설의 역할은 무엇일까?

훌륭한 소설들은 너무나 많으니까 지난 하반기라고 한정해 보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국내 단편소설 중에 <미조의 시대>라는 작품이 있었다. 취업 준비 중인 미조는 5000만원으로 서울에 엄마와 살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닌다. 그리고 가깝게 지내는 수영 언니. 그림을 잘 그리고, 그래서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수영 언니는 현재 성인 웹툰을 그리며 생활을 꾸려나간다. 처음엔 그냥 읽고 지나갔는데 시간이 갈수록 미조와 수영 언니 생각이 났다. 미조는 “문 열고 엎어지면 벽인 그런 집”으로 엄마와 이사를 했을까, 오늘도 성인 웹툰을 잘 그려서 상사에게 칭찬받은 수영 언니는 퇴근 후 혼자 도림천을 서성거리고 있을까. 그들이 사는 시대는 지금 우리의 시대이며 사람이 사는 데 시대의 영향 없이 불가능하다는 지점을 확인하게 된 단편이었다. 그래서 가끔, 미조와 수영 언니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청년들이 잘 살고 있었으면 하고. 마치 진짜 살아 있는 이웃들처럼.
조경란 소설가
해외 단편소설로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고음악(Early Music)>을 잊을 수 없다. 40살의 로드니는 피아노의 전신인 고전악기 클라비코드 연주자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건강관리 기관에서 일하고 아내 리베카는 전자레인지에 20초 데우면 향기가 나는 봉제 쥐 인형을 집에서 만들고 있다. 로드니는 안식을 찾듯 아침저녁으로 15분씩, 지금은 아무도 배우고 듣지 않으려는 클라비코드를 연주하곤 한다. 그런데 아직 그 악기의 대금을 갚지 못했고 이자는 불어났으며 압류하겠다는 독촉 전화가 걸려온다. 그런 불안 속에서 로드니는 그날 저녁, 그 악기를 더 헌신적으로 연주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쓸모없을, 그 아주 잠깐뿐인 열정과 희열이 그에게는 필요하니까.

그러나 로드니는 알고 있다. 자신이 막다른 길에 좀 더 일찍 이르렀을 뿐이며 “아침에 15분, 저녁에 15분 연습만으로는 전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것도. 이 현실적 아픔 속에서만 소설이 끝났다면 감동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재우고, 로드니와 리베카는 어둠 속에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삶의 어떤 비밀을 알게 된다.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지금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그들은 쓰레기통에 버린 불량 쥐 인형을 주워 실패를 바로잡으려 한다.

단편소설에서 필요한 어떤 문장들, 캐릭터의 힘, 인과적인 사건들, 효과적인 시간과 공간 외에도 이 소설이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어 보인다. 생활에 쫓기는 삶이지만 아침에 15분, 저녁에 15분을 쓸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

새해 첫 주를 보내며 작업실 청소를 했으나 나는 여전히 몇 년 전 티슈 통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떼지 못했다. “하루 두 시간 고독하게 공부하라”라고 써 둔. 이제 ‘아침에 15분, 저녁에 15분’에 대해 생각할 때가 온 듯싶다. 소설을 읽고 쓰는 일상을 지속하기 위하여. 물론 그것은 아침저녁 15분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나 일단 상징적으로. 좋은 단편소설들은 최근에 나에게 이런 진실들을 알려주었다. 하고 싶은 일을 될 때까지 연습하고 지속하며,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시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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