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상황도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찍는다..이게 리얼입니까? [이진송의 아니 근데]
[경향신문]
‘어그로’라는 말이 있다. 관심을 끌고 분란을 일으키고자 인터넷 게시판 등에 자극적인 내용을 올리거나, 그런 행동을 의미한다. 주로 ‘어그로 끈다’라고 쓴다. 언젠가 나도 어그로를 끌려고 한 적 있다. “내가 발간하는 독립잡지 ‘계간홀로 :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홍보하기 위해 데이팅 프로그램에 나가볼까?!” 당시 <짝>(SBS)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나는 프로그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러 요소 때문에, 흥미를 끄는 출연자가 될 것 같았다. 보인다, 나의 미래. 별 하나에 우스꽝스러운 자막과, 별 하나에 처량한 연출과, 별 하나에 악플… 악플! 상상은 망상으로 끝났지만, 나갔다면 예상보다 더한 지옥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일반인 출연자를 적극적으로 쇼에 끌어들이지만, 정작 보호 장치는 마련해두지 않으니까.
화제 됐던 커플 매칭 프로그램서
여성 출연자 향한 남성 출연자의
감정적 압박에 시청자들 ‘공분’
‘스걸파’는 불공정 논쟁 벌어져
방송국의 ‘어그로 끌기’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방송국 놈들’이라는 연예인 출연자들의 한탄이 보통 명사처럼 통한다. 이 분야 국가대표는 단연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채널 엠넷(Mnet)이지만 다른 채널도 만만치 않다.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제성이고, 무반응보다 욕을 먹는 게 훨씬 낫다. 그러다 보니 논란이 될 만한 장면을 거르지 않고, 혹은 평범한 장면을 자극적으로 편집해 내놓는다. 문제는 일반인의 TV 프로그램 출연이 늘어나면서, 소속사도 방송 경험도 없는 일반인 출연자가 감당해야 하는 각종 후폭풍. 최근 일반인들이 출연하여 커플이 되는 <나는 Solo>(‘나는 솔로’·NQQ, SBS Plus)가 여러모로 화제였다. 4기 방송 중 한 남성 출연자가 여성 출연자를 감정적으로 압박하는 장면이 시청자들의 큰 공분을 산 것이다.
나이가 열두 살 넘게 차이 나는 남성이 “사랑을 머리로 하지 말라”며 만난 지 겨우 하루 지난 여성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다른 남성들도 함께 있는 데이트를 망친 후,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은 매우 폭력적이다. 논란이 커지자 제작진은 패널의 입을 통해 약간의 해명 또는 변명을 내놓는다. “다양한 출연진이 있고, 시청자들 또한 보여주는 상황에 대해 각자의 의견과 해석이 존재한다. 제작진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현장을 담아냈다. 객관적으로, 개입 없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중립적인 것 같지만 자주 기만적이다. 일방적인 공격이나 피해가 발생할 때 개입하지 않는 것은 객관적 태도가 아니라 방관이다. 누군가의 피해를 찍은 것이 예능일까? 리얼리티에서 카메라와 제작진이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2014년, <슈퍼맨이 돌아왔다>(KBS2)에서 송일국은 세쌍둥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간다. 아이 중 한 명이 물에 빠진다. 송일국이 금방 알아채긴 하지만, 그때 카메라를 든 제작진은… 허우적대는 아이를 ‘찍고 있다’.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리얼하게. 다시 질문. 리얼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Solo>는 마지막에 출연자에 대한 응원과 격려를 부탁한다. 여성 패널 송해나가 여성 출연자의 피해를 짧게 언급하지만, 이 역시 여성 출연자가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로 마무리된다. 마치 피해자가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듯이. 돌발 상황은 촬영 중 변수에 해당한다. 촬영 중 위기와 변수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것은 출연자의 몫이 아니다. 제작진은 출연진 섭외와 인터뷰를 거쳐 한 기수를 구성한다. 며칠 동안 폐쇄된 곳에서 합숙하는 만큼, 출연자의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출연진을 한 팀에 꾸릴 때는, 연령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계와 강압성을 고려해야 한다. 출연자는 소개팅의 주선자 격인 제작진을 믿고 참가한다. 사전 인터뷰를 통해 폭력적인 출연자를 미리 걸러내지 못했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데이트폭력이나, 구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각종 괴롭힘과 범죄가 일어나는 현실에서 시청자는 그런 ‘리얼리티’를 TV에서마저 보고 싶지 않다. 제작진 차원에서 중간 퇴소 같은 단호한 대처를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제작진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출연자를 한 공간에 머물게 함으로써 시청자에게까지 고통을 주었다.
비난받을 장면을 그대로 내보낸 것 또한 윤리적인 문제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잘못했든 간에, 사람들 앞에 돌을 맞으라고 내던지는 꼴이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날것의 현실이 아니다. 편집과 연출을 거친 방송이다. 있었던 일을 은폐하라는 게 아니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율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논란이 불거진 <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엠넷·이하 ‘스걸파’)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클루씨’가 ‘안무 트레이드’ 미션에서 경쟁 크루인 ‘스퀴드’에 우스꽝스러운 안무를 줬는데, 이것이 공정한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프로그램의 인기만큼 반응 또한 과열되었다. 쏟아지는 비난으로 클루씨의 멤버 중 일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폐쇄했다. 결국 엠넷은 마스터인 ‘라치카’와 클루씨가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민낯으로’, 중요하다)을 영상으로 올렸다. 마지막에는 제작진의 입장도 자막으로 뜬다. “댄스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이 즐길 수 있게 건강한 경쟁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제작진도 보다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어어, 동작 그만. 밑장 빼기 없어.
애초에 미션부터가 논란의 씨앗을 품었다. 안무 트레이드 미션은 <스걸파>의 전신인 <스트릿 우먼 파이터>(엠넷)에서도 있었다. 장르가 다른 댄서들이 안무 트레이드를 했을 때 어떤 어려움과 논란이 발생하는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화제가 됐고 위기 상황에서 각 크루의 캐릭터를 해석하는 재미로 부상했다. 낯선 안무를 소화하느라 댄서들이 부상 위험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연습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 또한 ‘근성’으로 포장됐다. 시청자들은 욕하면서 봤다. 나훈아 가로되, 욕하는 자가 있어야 슈퍼스타가 될 수 있나니. 그래서 제작진은 이번 안무 트레이드 미션을, 좀 더 ‘어그로 끌리게’ 수정해서 내놨을 것이다. 자신들이 짠 안무를 경쟁팀에 ‘줘버리면’ 끝인 미션을 통해 상대의 무대를 망치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셈이다. 실제로 다른 팀도, 자신의 무대보다 경쟁팀이 소화하기 어려운 안무를 짜는 데 몰두했다. 누구나 이기고 싶은 마음에 무리수를 둘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에 재미와 화제를 위해 미성년 출연자들을 내던진 것은 어른들과 제작진의 잘못이다.
일방적 공격·피해도 그대로 찍는
제작진의 객관은 사실상 ‘방관’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인 출연자에
<나는 Solo>는 4기가 끝나자 피해 복구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곧장 5기 홍보에 열을 올렸다. 엠넷이 <스걸파>에 출연한 일반인 출연자를 돌볼지도 회의적이다. 시청자의 관점에서, 방송국이 일반인 출연자를 쓰는 방식은 일회용품과 비슷하다. 한 번 쓱 닦고, 버린다. 재출연을 염두에 두는 연예인과 다르다. 반면 일반인 출연자의 세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SNS 시대, 쏟아지는 관심과 비난의 양은 평범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영국의 연애 리얼리티 <러브 아일랜드> 일반인 출연자 중 두 명이 자살했고, 일본의 데이팅 프로그램 <테라스 하우스> 역시 출연자의 자살로 해당 회차가 모두 다시 보기에서 삭제되었다. SBS의 인기 예능이었던 <짝>은 2014년 일반인 출연자가 촬영 도중 자살하면서 현장의 정서적 환경이 가혹했던 것은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러브 아일랜드>를 제작한 영국의 ITV는 출연자에게 심리치료를 지원하고, SNS 및 재정 관리를 돕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작진의 신중한 사전·사후 관리와 적극적 출연자 보호가 필요하다.
더불어, 시청자 또한 시청 태도를 성찰해야 한다. 일반인 출연자의 경우 몰입하기 쉽고 심리적 거리가 가깝다. 그래서 연예인보다 좀 더 쉽고 빠르게 평가와 비난의 미끄럼틀을 타게 된다.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마음에 들 수 없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지적할 권리가 없으며, 상대는 내가 느낀 불쾌함을 알 의무가 없다. 인간은 입체적이고, 우리가 보는 장면은 많은 가공을 거친 방송이다. ‘내’가 그 상황에 부닥쳤더라도 모두에게 비난받지 않을 선택을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진 것으로 간결하게 받아들이고 악플이라는 짱돌을 내려놓자. 내가 아니라도 이미 그 대상은 일상을 흔드는 격랑 속에 있으니. 누군가에게는, 악플마저 신나는 관심이 된다. 싫은 대상일수록 원하는 것을 주지 말고 무관심 속에 둥둥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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