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라는 말에 새겨진 군주제의 망령

신지영 2022. 1. 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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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의 희망으로 시작했던 2021년이 거리두기 강화 조치 속에서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만은 연일 북적이며 뉴스를 쏟아낸다.

'국모를 꿈꾸는 신분 세탁업자'라는 표현에 이어 '국모를 뽑는 건 아니다'라는 말까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 '국모'라는 표현이 난무한다.

그 어떤 표현보다 군주제의 망령이 가장 깊게 서려 있는 말은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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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표현보다 군주제의 망령이 가장 깊게 서려 있는 말은 '대통령'이다. '크게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은 주권자를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가 지난 12월15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신의 희망으로 시작했던 2021년이 거리두기 강화 조치 속에서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만은 연일 북적이며 뉴스를 쏟아낸다. 쏟아지는 뉴스를 보다 보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지 의심하게 하는 표현들을 만나게 된다.

최근 ‘국모’ 논쟁이 대표적이다. ‘국모를 꿈꾸는 신분 세탁업자’라는 표현에 이어 ‘국모를 뽑는 건 아니다’라는 말까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 ‘국모’라는 표현이 난무한다. 대통령 선거가 왕을 뽑는 선거도 아니고 피선거권이 성별에 의해 제한을 받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배우자를 국모라 표현한다.

국모 논쟁은 정치권의 뿌리 깊은 군주제 망령과 함께, 정치권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민들은 성별이 드러나지 않도록 ‘대통령의 배우자’ ‘후보자의 배우자’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수준에 이른 지 오래인데, 정치권은 국모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럼 결혼한 여성 대통령의 배우자는 국부란 말인가? 왜 부끄러움은 늘 국민 몫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대표는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낸다

정치권에 깊이 서려 있는 군주제의 망령은 이처럼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대통령 선거에 나가는 것을 ‘대권에 도전하다’ ‘대권을 꿈꾸다’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대권(大權)’은 말 그대로 왕이 지녔던 ‘큰 권한’을 상징한다. 대통령이 되려는 것을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권자 입장에서는 몹시 불쾌하다.

정치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왕조 시대의 경구에서도 군주제의 망령이 서려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군주민수(君舟民水)’는 최근 정치권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경구다. 왕을 배에, 백성을 물에 비유한 이 말은, 물은 배를 뜨게도 하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말로, 2016년 탄핵 정국 속에서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발표됐다.

그 후로 정치인들은 이 표현을 자주 언급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배를 띄우는 것도, 뒤엎는 것도 국민임을 명심하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들을 두려워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민이 ‘물’이라면 정치인은 ‘배’, 즉 군주란 말인가? 겸손한 자세로 국민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무색하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물이 아니고 배다. 대한민국에서 물은 바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우리의 대표자들이다. 그러니 이 경구를 듣고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주권자인 국민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선거 때마다 주권자인 국민은 투표권을 잘못 사용하면 대한민국호가 좌초될 수 있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 경구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그 어떤 표현보다 군주제의 망령이 가장 깊게 서려 있는 말은 ‘대통령’이다. ‘크게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은 주권자를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19세기 말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수입된 단어인 만큼 군주제의 세계관이 충실히 담겨 있다. 대통령 선거에 나가는 것을 대권에 도전한다고 표현하며 왕이 되려는 듯 행동하는 것도, 우리가 뽑은 대표가 왕인 양 행동하며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대표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2022년 3월9일은 우리의 주권을 위임받아 우리를 위한 정책을 실행할 대표자를 선출하는 날이다. 왕은 선출되는 것이 아니니 하늘이 낸다는 말이 맞다. 하늘이 낸다는 말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를 우리가 직접 선출한다. 그러니 우리의 대표는 우리가 내는 것이지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다. 잘못 내면 대한민국호가 뒤집어질 수 있으며 그건 우리의 책임이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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