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학림·미네르바·브람스..이 오래된 카페의 낭만

한겨레 2022. 1. 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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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임지선의 브랜드로 공간 읽기]브랜드로 공간 읽기
학림·미네르바·브람스..
오랜 전통의 서울 카페들
'신상 카페'에 없는 느낌
장소성은 브랜드가 된다
1956년 문을 연 ‘학림’. 당대 사회·문화운동가, 무명의 사상가, 문인, 지금은 유명해진 예술가들의 젊은 시절 아지트였다. 임지선 제공

새롭게 해가 바뀌면 으레 하는 것이 있다. 새 노트를 사고, 새 안경을 맞추고, 새 양말을 주문하고. 나만의 송구영신 의식이랄까. 핸드폰 액정화면 속 가득 채운 1, 2, 3, 1이라는 숫자가 0과 1로 바뀌면 어쩐지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개운한 기분이 든다. 해묵은 것은 조심히 정리하고, 새로운 그릇에 새로운 마음을 담는다. 한해의 첫날, 모두가 새로움을 찾는 날 되레 오래되었기에 더 가보고 싶은 기억과 낭만의 공간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 르 프로코프(Le Procope),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이 있다면 서울에는 학림, 미네르바, 브람스가 있다. 새해 첫 칼럼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카페, 아니 오래된 낭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대학로 학림과 신촌의 미네르바

시간이 흘러 학림다방은 서울미래유산이 되었고, 학림은 학림 자체를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임지선 제공

1956년 문을 연 ‘학림’은 배움의 숲이라는 뜻이다. 학림을 다녀간 이들을 살펴보니 이만큼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당대의 사회·문화운동가, 무명의 사상가, 문인, 지금은 유명해진 예술가들까지. 학림의 여신이라 불리던 전혜린부터 김승옥, 이청준, 천상병, 김지하, 황지우 등 한국 문학사의 걸출한 소설가, 시인들이 초기 학림다방의 연대기에 등장한다. 70~80년대에는 사회운동가, 저항인사들이, 90년대부터는 음악·미술·연극인들이 학림의 역사를 채워갔다. 김광석이 공연 뒤풀이를 한 곳도, 송강호와 설경구가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갔던 곳도 학림이었다. 때 묻은 액자와 벽지 하나에도 그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느껴지더라. 시간이 흘러 학림다방은 서울미래유산이 되었고, 학림은 학림 자체를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커피의 맛을 꾸준히 발전시켜 학림 드립백이나 원두를 판매하고 있었고, 2020년에는 류가헌 갤러리에서 ‘학림다방 30년’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학림은 역사와 낭만은 그대로 간직한 채 학림이라는 브랜드에 걸맞은 속도로 발전을 꾀하고 있었다.

학림다방의 내부 모습. 때 묻은 액자와 벽지 하나에도 그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느껴진다. 임지선 제공
미네르바의 과거 모습. 임지선 제공

동숭동에 학림이 있다면 창천동에는 미네르바가 있다. 신촌골 학생들의 오래된 낭만은 미네르바와 독수리다방에 있었다. 1971년 생겨나 신촌의 명물로 통했던 독수리다방이 잠시 폐업했다가 독다방으로 부활한 것과 다르게 미네르바는 1975년 그때 그 모습과 커피 그대로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이름을 좇아 지은 이 카페는 당시엔 다소 생소했던 ‘사이펀 커피’로 유명했다. 천천히 추출된 커피에서 원두의 향을 음미하고 있자면 어쩐지 브라운관 속에서나 보았던 수줍은 미팅 자리가 연상된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원목으로 마감되고 체크무늬 테이블 덮개가 포근히 깔린 나무 테이블, 의자까지. 어딘가 풋풋하고 낭만적인 공간의 분위기에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봤던가, 한국 로맨스 영화에서 봤던가, 갸웃거리며 없던 추억을 만들어내게 된다.

미네르바는 1975년 문을 연 그때 그 모습과 커피 그대로다. 임지선 제공

오래된 공간의 매력

1985년 문을 연 브람스는 클래식을 좋아하던 카페 주인이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차린 가게라고 한다. 임지선 제공

대학생들에게 학교 앞 카페가 있고 직장인들에겐 회사 앞 카페가 있다. 안국역 사거리 2층에 있는 카페 브람스는 현대사옥, 헌법재판소, 외국 문화원 등 굵직하고 오래된 회사와 사무실들 사이에 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내 기억 속에도 브람스가 새겨져 있다. 묵직한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12월 어느 퇴근길,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던 사거리에서 살짝 올려다보면 보이는 오래된 간판. 어둑한 창문과 ‘coffee’, ‘beer’라는 글자, 그리고 브람스 초상화. 이 거리를 같이 걷던 이는 해가 지나 바뀌어도 그 자리 그대로 있어준 건 브람스뿐이었다. 1985년 문을 연 브람스는 클래식을 좋아하던 카페 주인이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차린 가게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장에는 큼지막하게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군데군데 둔 난로 위엔 주전자가 올려져 있고 로마 숫자의 벽시계가 창문 옆에 걸려 있다. 이제는 더는 신중하게 고른 클래식 음악이 흐르진 않지만 시계, 계단, 창문, 벨벳 의자, 심지어 무심한 듯 말이 짧은 주인의 태도마저 이곳에서는 하나의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서울의 공간은, 특히나 카페는 더 그렇게 여겨졌다. ‘#신상카페’ ‘#가오픈카페’와 같은 해시태그가 필수가 되고 검색의 기준이 된 시대. 그러나 새로워야만 좋은 것도 아니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나에겐 특히 카페가 그러하다. 칼럼의 필자이자 브랜드 디렉터로서 새로운 공간과 브랜드를 찾아 탐구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라지만 익숙하고 오래된 공간이 주는 안정감, 편안함은 대체될 수 없다. 카페는 더 특별하다. 원두 가는 소리, 이곳만의 음악, 여름의 햇살과 겨울의 바람이 반복되어 닳은 계단, 그리고 옛 추억들. 카페만이 갖는 낭만이 있다. 공간에 시간이 쌓이고 사람이 오가면 장소성이 생겨난다. 이 장소성은 곧 브랜드가 된다. 시크하고 힙한 카페가 하루가 다르게 생기고 사라지는 서울, 그 공간의 변화 사이에 남아 있는 이 오래된 카페들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 에센스는 바로 이 낭만이다.

임지선 브랜드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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