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07] 대의를 위한 합심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2022. 1. 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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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 방일을 계기로 서구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도쿠가와 막부는 1856년 본격적 서양 학문 연구·교육기관인 만서조소(蠻書調所)를 출범시킨다. 이곳에 가장 먼저 교수로 초빙된 인물 중에 데쓰카 리쓰조(手塚 律蔵·1822~1878)가 있었다. 조슈(長洲)의 의사 집안 출신인 데쓰카는 출중한 어학 실력으로 명망 높은 난영(蘭英)학자로, 일찍부터 서구국과 친교 맺기, 서양 문물 적극 도입을 주장한 개국론자였다.

1858년 막부가 서양 5국과 정식 수교 조약을 맺자 일본 각지에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다. 데쓰카의 고향 조슈가 그 선봉에 선 형국이었다. 양이론자들의 활동이 과격해지면서 개국론자들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던 시절이었다. 데쓰카도 화(禍)를 입은 적이 있다. 1862년 조슈번의 양이론자들이 개국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쓰카를 매국노로 낙인찍어 에도 한복판에서 주살하려 달려들었고, 그는 겨울 강에 뛰어들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에도를 떠나 이름을 바꾸며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동향인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그에게 전기가 찾아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슈번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다음이었다. 그는 1870년 만서조소의 후신인 개성(開成)학교 교수에 복귀하였고, 1876년에는 외무성 관료로 임용되어 러시아 상대 통상 업무에 진력하다가 1878년 임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 도중 병사하였다. 양이파의 테러를 모면했던 개화파 지식인이 자신을 참살하려던 자들에게 발탁되어 국정의 뜻을 펼치다가 순직하였으니,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역사의 굴곡이 있었던 셈이다.

조슈의 유신 세력은 막상 막부 타도에 성공하자 과감하게 ‘개국 화친’으로 노선을 전환하였고, 데쓰카와 같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정치적 혼란이 정리되자 구원(舊怨)을 내려놓고 신국가 건설에 힘을 합친 것이 메이지 일본을 만든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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