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제진역의 꿈
[경향신문]

인류 역사에서 철도는 문의 수호신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졌다. 철길 위로 사람과 화물, 사상을 실어나르며 근대문명을 꽃피웠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는 식민지 침략, 수탈의 잔인한 도구였다. 1899년 서울~인천을 잇는 경인선으로 시작된 한반도의 철도에도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이 스며 있다. 이런 명암에도 불구하고 철도는 여전히 인류의 교류·소통을 상징하는 필수 발명품이다.
철도는 또한 우리에게 분단의 상흔으로 다가온다. 남북을 잇는 철길은 있지만, 그 위로 무엇도 오가지 못한다. 경원선(서울~원산)인 철원 월정리역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에 부서진 열차 잔해가 검붉은 녹을 덮어쓴 채 철로 위에 서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은 분단민들의 애끊는 절규다. 남한 최북단의 기차역인 강원 고성군의 제진역도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제진역(당시 저진역)은 한국전쟁으로 폐역됐다가 2007년 남북 합의로 북한의 감호역과 다시 연결됐다. 남북이 각각 철로를 놓아 두 역을 잇고 시험운행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교류가 없어 본질을 상실한 철길이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5일 제진역에서 강릉~제진 구간(111.74㎞)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 착공식을 열었다. 이 구간이 완공되면 동해선은 그 이름에 걸맞게 동해를 따라 저 남쪽 부산에서 포항·강릉·제진을 지나 감호·금강산·원산·나진을 거쳐 저 북쪽 두만강역까지 연결된다. 동해선은 한반도라는 공간을 훌쩍 넘어서는 연장성을 지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과 연결해 부산에서 유럽까지 직행할 수 있다. 남북 간은 물론 동북아~중앙아~유럽의 물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철도망 연결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이 겨울의 한파처럼 남북관계가 얼어붙어서다. 한겨울 꽁꽁 언 땅속에서 나무는 틔울 싹을 키우며 봄맞이를 준비한다. 강릉~제진 구간 철도 건설도 남북 교류의 봄맞이 준비라 믿는다. 착공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제진역이 사람들과 물류로 붐비는 그날 마침내 한반도에는 완전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길을 통한 남북의 교류는 평화와 통일로 가는 첫걸음이다. 결코 평탄하지 않은 길이지만 꼭 가야만 할 길이다.
도재기 논설위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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