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난징, 베이징

한겨레 2022. 1. 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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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서양어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시간이 나면 라틴어보다는 한문을 공부하고 싶고 프랑스어나 독일어보다 일본어를 먼저 익히고 싶은 마음이다.

예전에 고명한 영문학자이면서 여러 서양어에 이해가 깊다고 알려진 선생님이 학생의 과제 여백에 옳은 말이라는 뜻으로 적어주는 시야(是也)라는 두 글자가 그렇게 부러웠던 것은 단지 내 과제에서는 그 말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마음인지는 몰라도 그 마음 때문에 챙겨두었던 신경란의 <풍운의 도시, 난징> 과 <오래된 미래도시, 베이징> 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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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어쩌다 보니 서양어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시간이 나면 라틴어보다는 한문을 공부하고 싶고 프랑스어나 독일어보다 일본어를 먼저 익히고 싶은 마음이다. 예전에 고명한 영문학자이면서 여러 서양어에 이해가 깊다고 알려진 선생님이 학생의 과제 여백에 옳은 말이라는 뜻으로 적어주는 시야(是也)라는 두 글자가 그렇게 부러웠던 것은 단지 내 과제에서는 그 말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책을 정리할 때도 읽지 않고 쌓아둘지언정 동양 관련 책은 좀처럼 내보내지 못한다.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무슨 마음인지는 몰라도 그 마음 때문에 챙겨두었던 신경란의 <풍운의 도시, 난징>과 <오래된 미래도시, 베이징>을 읽는다. 여행은 감각에 맡기고 공부는 책으로 하자는 쪽이라 억눌린 여행 욕구를 풀자는 의도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난징>에서는 왕이나 군인만이 아니라 이백 소동파 왕희지 도연명 같은 어마어마한 이름, 물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름뿐인 이름이 장소와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어떤 구체성이 그야말로 여행을 대체할 만큼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 실감은 나 혼자 그 장소에 간다면 오히려 얻지 못할 것이니, 이는 전적으로 이 책이 속한 시리즈의 표현대로 “도시”를 “아카이브”로 파악할 수 있는 저자의 능력, 그리고 저자가 현장에서 살고 걸은 긴 세월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한갓진 답사 여행의 느낌은 절반까지일 뿐 <…난징>은 갑자기 근현대의 아수라장을 그려내기 시작하여, 뭔지 알 수 없는 그 마음도 덩달아 치열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곳은 난징조약이 체결된 곳이었고, 태평천국과 쑨원 임시정부와 장제스 정부의 수도였고, 난징 대학살의 현장이었고 대규모 위안소가 있던 곳이었다. 이렇게 책이 느닷없이 20세기 전환기로 뛰어간 것은 물론 저자 탓이 아니라 15세기에 베이징으로 천도한 명나라 영락제 탓인데, 그 빈자리에 저자의 <…베이징>이 들어오면 대체로 아귀가 맞는다.

사실 베이징은 영락제 천도 이전에 이미 원나라(몽골)나 금나라(여진)의 수도였고, 나중에 후금, 즉 청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저자가 암시하는 대로 그곳은 중국의 변경이 아니라 유목민과 농경민의 접점이 되는 자리였다. 남쪽 난징에 있을 때는 중국 대 북방 침입자라는 틀이 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데, 베이징으로 옮겨와 반대편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시야를 얻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 누구의 눈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두 눈을 아우르는 새로운 눈이 있을까.

꽤 궁금한 문제인데, 저자는 왕조 변화나 곽약사 등 여러 인물의 평가에서 적어도 한쪽 눈을 따르지는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저자가 중국인이 아니어서 얻을 수 있는 시각일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변함없이 값지다. 또 저자는 최치원에서부터 원나라에 살던 수많은 고려인, 소현세자, 이방원, 박지원, 김구와 김원봉,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난징과 베이징을 찾거나 그곳으로 밀려갔던 한반도인을 굵은 실로 엮어 계속 큰 이야기 안에 직조해 넣는데, 이 또한 다른 의미를 떠나 일단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과연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가령 동아시아 정도 되는 넓은 각도를 확보하게 된 것일까. 불행히도 <…베이징> 또한 그곳의 마지막 황제가 대동아공영을 내건 만주국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현대에 다다르는데, 저자는 이 현실을 딛고 넘어서지 않은 시각은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상 면에서도 이곳은 중체서용 동도서기 화혼양재가 모두 파탄을 맞이한 현장이다. 그로부터 백여년, 이제 중 동 화를 눌러 동아시아를 건너뛴 세계화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의 힘으로 밥을 먹으며 동을 선망하던 마음이 어수선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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