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임동혁·손열음·김선욱..황금세대 키웠고, 미래세대 키워낼 K클래식 교육법
◆ 매경 포커스 ◆
2010년대 들어 한국 클래식의 위상은 말 그대로 월드 클래스 반열에 올랐다. 현재 한국 클래식계 간판인 조성진, 임동혁, 손열음, 김선욱 같은 30대 젊은 연주자들이 이토록 짧은 기간에 쏟아져 나온 것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다만 2000년 전후로 한국 음악계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따져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우선 앞서 언급한 손열음과 임동혁의 활약이 또래 한국인 피아니스트들에게 엄청난 자극제가 됐다. 마치 골프 스타 박세리가 1998년 US오픈에서 연장전 끝에 극적으로 우승한 이후 박세리 키즈들이 등장했고, 이후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무대를 주름잡은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전에도 피아니스트 백건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등 세계적인 선배 음악가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은 당시 척박했던 한국의 삶과 동떨어진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국민은 이들의 활약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우리 아이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꿈까진 꾸지 못했다.
하지만 2000년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다는 점에서 그 폭발력이 달랐다. 윤택한 시기에 손열음, 임동혁 등이 치고 나가자, '우리 아이도' '나도'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활약은 한국 클래식계에 굉장한 기폭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유전자도 꼭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 좋아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당장 TV를 틀어보라. 채널을 넘기다 보면 노래 경연대회 프로그램 2~3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골목 곳곳마다 화려한 노래방 간판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우리 할머니들은 부엌에서도, 밭에서도 늘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우리 안에 내재된 음악성과 풍부한 감수성이 윤택해진 생활환경 가운데 가시적으로 발현된 결과가 황금세대의 등장인 것이다.
아울러 준비된 음악교사들이 황금세대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1980년대 들어 한국인 음악학도들이 본격적으로 해외 유학에 나섰다. 나는 1982년 미국 줄리아드음악학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는데, 1980년대 중후반이 줄리아드 역사상 한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았던 시기다. 이들 유학생이 귀국해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초반부터다. 이때부터 국내 음악교육의 질적 수준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즉 클래식 황금세대의 등장은 △경제 성장 △국제 콩쿠르 입상에 따른 상호 자극 △우리 민족의 음악적 유전자 △IMF 외환위기로 생겨난 연주 기회 △1980년대 해외 유학파들의 귀국 등 여러 요소가 맞물린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 음악가들이 그럭저럭 잘하는 것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 이유를 규명하는 데 충분하진 않다. 한국 클래식이 짧은 시간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데는 우리만의 차별화된 클래식 교육법이 주효했다.
한국 클래식 교육은 1980년대 유학파들이 귀국한 1990년대를 기점으로 연주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됐다. 여기서 연주력이란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이 준비한 만큼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는 내가 연주할 곡을 선생에게 배우는 게 레슨의 전부였다. 쉽게 말해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 표현법 등에 배움이 국한됐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선 어떻게 하면 무대 위에서 실전 연주 능력을 강화할지가 악기 교육의 최대 화두가 됐다. 관객이 들어선 무대라는 공간, 오롯이 나의 연주만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1시간, 내 컨디션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정해진 공연 날짜. 이 같은 강도 높은 상황에서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강인한 연주자를 육성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접근인 동시에 공연예술의 본질에 보다 다가가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아무리 작품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탁월하다고 해도 무대에 올라 제대로 연주를 펼쳐내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공연예술의 냉엄함이다. 이런 무대 중심의 교육이 한국인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한국 연주자들이 콩쿠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나는 올림픽 때마다 제자들에게 양궁 경기만큼은 꼭 보라고 말한다. 양궁 선수들의 눈빛, 집중력을 보라는 것이다. 연주자들이 지녀야 할 눈빛, 집중력과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공연예술의 속성이 스포츠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한국인 연주자들은 왜 콩쿠르에 강한가라는 질문은, 한국인 양궁선수들은 왜 올림픽에서 강한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무대(올림픽)에서 최상의 결과를 내기 위한 방식으로 교육(훈련)이 이뤄져 왔고, 우리 연주자들은 타고난 강한 정신력으로 이 같은 교육을 소화해 내면서 한국 클래식 교육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게 된 것이다.
문제는 기교 중심, 무대 중심의 한국 음악교육이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이다. 일단 국내적으로는 예술을 스포츠 대회처럼 바라보는 인식이 팽배해져 예술교육을 왜곡할 지경에 이르렀다. 쇼팽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 같은 굴지의 대회에서 상을 받았느냐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다. 올림픽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금메달을 몇 개 따느냐를 따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분위기는 예술가들의 개성 저하로 이어진다.
게다가 국제무대에서도 과거 한국식 음악교육으로 길러진 연주자들이 더 이상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는 우리 연주자들의 연주에 감탄하던 서양 음악가들이 이제는 "저 친구의 연주는 항상 예측대로야" "음색이 늘 같아"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변화를 촉발한 것은 2000년대 들어 우리 연주자들이 올린 성과였다. 우리가 제시한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연주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니 개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세계 음악계의 흐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는 예술의 본질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 흐름을 거스르기 힘들다.
많은 제자를 양성한 음악 교사 중 한 사람으로서 내 고민도 "어떻게 하면 개성 넘치는 예술가를 길러낼 수 있을까"로 향하고 있다.
한국 음악가에 대한 세계 음악계의 고정관념을 만드는 데 내가 일조한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한국 클래식 교육은 한국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클래식 강국으로 이끌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인정받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미래의 예비 음악가들도 음악 선생들도, 클래식 팬들도 개성 넘치는 연주와 예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19세기를 풍미했던 프란츠 리스트와 프레데리크 쇼팽은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강한 개성이 넘치는 예술가였다. 이제 쉴 새 없이 달려온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재점검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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