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동교회, 신분과 귀천을 뛰어넘는 숭고함

2022. 1. 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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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은 늘 붐비는 거리였다. 고미술품 가게, 골동품 가게, 고서점, 화랑은 물론이고 카페, 식당에 가느다란 엿을 파는 용수염 가게, 하다못해 피트니스센터까지 있어 사람들이 시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동네였다. 지금은 한산하다 못해 쓸쓸함이 인사동의 인상이다.

인사동네거리 작은 골목길을 걸으면 끝에 붉은 교회가 있다. 사람들이 잘 찾지 못하는 장소다. 이 교회가 100년 역사의 승동교회다.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130호인 교회 앞에는 3.1운동 기념터 표석이 서 있다.

승동교회는 1893년에 세운 곤당골, 즉 ‘고운 담 마을’이란 이름의 교회를 계승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약 200평 규모다. 지붕은 십자형 박공지붕, 정면의 박공은 크고 측면의 박공은 2단 처리했다. 정면에서 보면 중앙부는 대형 아치 창이 있고 좌우에 소형 아치 창이 있는데 현재 이곳을 출입구로 쓰고 있다. 건물은 로마네스크풍이다. 교회 건물은 20세기 초 24㎝짜리 붉은 벽돌로 쌓았다. 보수를 위해 벽돌을 찾았지만 모두 19㎝짜리였다. 새로 주문해 만들어도 시간의 흔적을 만들 수 없는 법. 난감하던 교인들은 붉은 벽돌을 수소문해 평택 고벽돌 집하장에서 똑같은 벽돌을 발견했다. 이 벽돌은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나온 벽돌이다. 이 집하장에서 벽돌 2만5000장을 마련해 보수를 마칠 수 있었다. 지진의 파괴가 새로운 시작이 된 셈이다.

승동교회는 드라마 같은 역사가 깃든 곳이다. 1893년 관철동에 백정 박 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식에게는 이름도 신분도 없는 백정을 물려줄 수 없어 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백정의 자식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때 곤당골교회에서 그를 받아주었다. 박 씨는 아들에게 “그곳에 가서 공부만 하고 예배는 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러다 박 씨가 콜레라에 걸렸다. 사경에 빠진 그를 가엽게 여긴 곤당골교회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당시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기적처럼 살아난 박 씨는 감동했다. 천한 백정을 임금의 주치의가 치료해 주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해서 그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춘이라는 이름과 세례까지 받았다. 하지만 곤당골교회의 양반 신자들이 백정과는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무어 목사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무어 목사는 한 마리 양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양반 출신 교인들은 따로 나가 예배 모임을 가졌다. 이후 이 예배 모임은 홍문동교회가 되었다.

박성춘은 신분 철폐와 함께 백정도 갓과 망건을 쓰게 해 달라 조정에 청원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날 박성춘은 잠자리에서도 갓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1898년 곤당골교회는 홍문동교회와 결합한다. 이 교회가 승동교회다. 1911년 박성춘은 백정 출신 첫 장로가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박봉출, 후에 개명해 박서양은 1900년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한다. 1908년 졸업한 박서양은 조선인 양의사가 된다. 이후 간도에 숭신학교를 세우고 대한국민회에도 참여했으며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관으로 활약한다. 이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고 2008년 광복절에 대한민국건국포장을 받았다.

한편 승동교회 청년회장 김원벽은 3.1운동에 참여한 학원 세력의 핵심이었다. 연희전문학교 기독학생회 회장이던 그는 YMCA 간사 박희도,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경성의전 김형기 등과 1919년 2월20일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의를 열고 독립 선언을 결의한다. 하지만 2월23일 김원벽은 박희도에게서 3월1일 민족적 거사를 언질받고는 학생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3.1 독립 선언서 배포를 준비한다. 3.1운동 후 김원벽은 3월5일 서울역 광장에서 2차 만세 운동을 거행해 일경에 체포된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문화재청]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12호 (22.01.1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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