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은 '옹치봉후'와 '읍참마속'

2022. 1. 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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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부터 시작된 인사도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기업들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자리에서 또 1년을 계획한다. 옹치를 제후에 봉하는 ‘옹치봉후’는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요직을 맡겨 조직원의 불만과 불안을 무마시키는 방법을 뜻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제갈공명이 아끼던 부하 마속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는 일화에서 생긴 말이다. 두 사자성어는 ‘포용과 공정’을 뜻한다.

▶약점을 파지 말고 강점을 발견하라

인사는 직장인 개개인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이 인사 대상자가 아니라도 누가 내 상사로 오는지에 따라 1년 농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소 존경하고 롤 모델이며 게다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이가 내 상사로 온다면 올 한 해가 밝고 기대감이 가득할 것이다. 반대로 회사에서 기피 대상 1호로 꼽히는 ‘진상 갑질의 표본’이 상사로 온다면 그저 ‘삼재의 시작이네’라는 마음으로 무탈하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물론 이런 기대감은 리더에게도 있다. ‘장’이 되어 부서를 맡게 되면 의욕이 과하다 싶게 매사에 열성일 것이다. 이런 리더에게 해 줄 조언이 있다. ‘설마 했는데 역시’라는 말이다. 이는 부정적인 말만은 아니다. 리더가 되었다고 기대감에 부풀어 ‘내가 맡은 부서는 다를 거야, 아니 달라야 해’라고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다. 윗사람 덕도 있어야 하지만 이제는 부하 직원 덕도 봐야 하는 세상이다. 리더가 되었다고 완장 찬 것처럼 조직을 자신의 방향으로만 이끌어서는 안 된다. 조직도 사람이 모인 작은 민심이다. 민심은 거슬러서 안 되고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중의를 모아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생각도 오만이다. 부처님, 예수님밖에 하지 못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먹을 필요도 없다. 소통하고 협의하고,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내 사람은, 조직은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강박을 이끈다. 이런 마음으로 조직을 지휘하는 순간, 리더는 권위는 물론 자리마저 보존하기 어려워진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런 리더는 성과를 위해, 더 높은 수치를 위해 조직원을 도구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성적을 매기고 그에 따라 누구에게는 인격을 부여하고 누구에게는 질책과 냉정한 평가만 하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를 보면 해설자가 꼭 하는 말이 있다. “시작하고 5분, 끝나기 5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 의욕이 넘쳐, 즉 마음은 하늘에 있는데 몸이 워밍업이 덜 되어 땅에 있는 시작 5분에 실수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서의 장이 되는 순간 그동안의 성적표, 인사 고과, 출신 대학 등이 가득한 서류는 집어 던져라.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부서원을 대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팁으로 여기면 된다. 경기 시작 5분이면, 직장에서는 딱 한 달이면, 리더나 부서원 서로에 대한 견적과 상황 파악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이 한 달 동안의 데이터와 평가를 믿고 리더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면, 구조화되어 있는 조직 안에서는 서열이 나누어져 있다. 담임 선생님이 바뀐다고 1등 하던 친구가 꼴찌가 되지 않고, 말썽만 피우던 친구가 모범생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부서원들은 잘 알고 있다. 해서 새로운 리더가 오기 전부터 에이스였던 친구는 여전히 자신이 에이스로 대접받을 거라 생각한다. 또 실적과 업무 평가에서 직전 상사에게 찍혔던 직원도 ‘부장이 새로 온다고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리 없잖아’ 하는 자포자기에 빠져 있다.

이런 고착화, 서열화된 구조를 깨야 한다. 물론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하는, 그래서 성적을 내야 하는 리더의 입장에서 업무 능력과 열의의 우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 새로운 평가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양궁 대표팀은 세계 부동의 1위다. 수십 년 동안 세계 1위를 놓치지 않는 요인은 다양하다. 넓은 저변, 대표팀에 대한 훌륭한 지원 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양궁 대표팀이 강해진 것은 ‘계급장, 훈장 떼고 모두 똑같이 시작’이라는 국가대표 선발전의 경기 방식 때문이다. 남자 대표팀, 여자 대표팀 선발전이 열리면 올림픽, 세계 대회 금메달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저 똑같이 남자 약 200명, 여자 80여 명이 예선전 사대에 선다. 그리고 수백 발의 활을 쏘고 성적순으로 32강, 16강을 가리는 것이다. 일테면 금메달 획득자나 세계 랭킹 1위에게 어떤 우선권도 주지 않는다. 사대에 선 모든 선수는 국가 대표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 활을 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어떤 선수가 국가 대표에 선발되어도 일정 수준의 한국 양궁 대표팀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한 발만 실패해도 세계 1위가 떨어지고, 선발전을 잘 준비해 우수한 성적을 올리면 무명의 선수도 국가 대표가 되는 이 시스템이 한국 양궁의 실질적인 힘인 것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모두 에이스가 될 수 없지만 모두 열등한 직원도 아니다. 이미 직장에 입사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일정 수준을 유지 혹은 발휘할 수 있다는 기본 검증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 우수한 자원의 역량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목표를 위해 효율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이고 의무다. 부서원의 약점보다 강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포용은 리더의 약점을 상쇄하는 비결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은 많다. 하지만 딱 두 가지만 지킨다면 실패하지 않는 리더가 될 것이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옹치봉후雍齒封侯’와 ‘읍참마속泣斬馬謖’이다. 한자라 어렵게 보일지 모르지만 뜻은 간단하다. 바로 ‘포용과 공정’이다.

옹치봉후는 한나라 고조 유방에서 유래한 말이다. 유방은 항우와 천하를 건 쟁패에서 승리한 후 한나라를 건국했다. 건국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과 장군과 책사의 활약이 밑바탕 되었다. 유방은 이들을 공신으로 임명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공신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고 그 순위에 따라 직책과 식읍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이 공신 임명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누가 1등 공신이고, 누구까지 포함되느냐를 두고 공신들은 분열했고 각 파벌과 각자의 이익을 우선했다. 더구나 한나라 건국 전과 직후에 벌어진 이른바 토사구팽을 직접 목도하면서 공신들은 일말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공신은커녕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였다. 유방은 공신 1위를 소하에게 주었다. 유방이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후방을 맡아 군량미와 병사를 조달하고 유방의 본거지를 튼튼하게 지킨 공이 적장의 목을 벤 것보다 더 크다고 판단했다. 뒤를 이어 조참, 장오, 주발, 번쾌, 역상, 해연, 하우영, 관영, 부관이 10위까지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수백 명의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자신의 공이 크다고 생각했다. 유방은 고민에 빠졌다.

공신 문제로 고민하던 유방이 낙양 남궁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장수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유방은 장량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장량이 답했다. “폐하, 저들이 아마도 모반을 계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깜짝 놀란 유방은 장량에게 “아니, 무슨 이유로 모반을 획책하는가?” 물었다. 그러자 장량이 “페하께서 이번에 공신 작위를 결정할 때 측근만 제후로 봉하시고 평소에 폐하께서 미덥지 않게 생각했거나 소원한 자들은 발탁을 주저하시니, 아마도 저들은 자신들을 토사구팽할 것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처벌이 두려워 차라리 모반을 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라고 답했다. 유방은 장량에게 해결책이 있는지 물었다. 장량이 답했다. “건국에 공을 세운 자 중 누가 보아도 폐하와 가장 거리가 멀고 또 폐하께서 싫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자를 제후로 봉하시면 장수들의 불안감은 가실 것입니다.”

방은 곧바로 옹치를 십방후에 봉하고 식읍 2500호를 내리면서 공신 서열 57위에 임명했다. 그러면서 137위 수무, 열외까지 포함해 총 143명의 공신에게 작위를 주었다. 그러자 조정은 바로 안정되고 관리와 장수들은 제자리를 찾았다. 즉 ‘옹치를 제후에 봉하는 것’이 바로 ‘옹치봉후’다. 이는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요직을 맡겨 조직원의 불만과 불안을 무마시키는 방법을 뜻한다. 장수들은 ‘폐하께서 제일 싫어하고 틈만 나면 죽이려 했던 인물이 옹치인데, 그 자가 제후가 되었으니 나는 무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옹치는 유방을 곤경에 처하게 했던 인물이다.

유방의 고향은 사천군 패현. 패현의 유력자는 두 명이었다. 바로 옹치와 왕릉. 유방은 패현에서 저잣거리 건달인 번쾌, 하후영 등과 어울리는 별볼일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람을 끄는 재주가 있어 왕릉과는 친하게 지냈다. 왕릉은 유방을 옹치에게 소개했다. 옹치는 유방의 출신과 하는 짓을 알고 있기에 그를 무시했다. 당시 패현의 말단 관리로 소하가 있어 유방은 말썽을 일으켜도 소하와 관리였던 조참의 덕으로 감옥살이를 면하곤 했다.

그런 유방이 왕릉의 도움과 해연, 번쾌, 주발, 소하, 조참의 힘을 빌어 기원전 209년에 거병했다. 자연스럽게 유방이 주장이 되고 왕릉과 옹치는 유방의 수하가 되었다. 왕릉은 이를 받아들이며 유방을 진심으로 따랐지만 옹치는 무뢰배 유방을 멸시했다. 후에 항우가 왕릉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왕릉에게 초나라에 귀순하라 했지만 왕릉의 어머니는 스스로 자결하면서 왕릉에게 유방을 보필하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또 유방의 고향 친구 해연은 결혼도 하지 않고 유방을 따랐다. 그는 결혼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천하가 어지럽고 주군이 전쟁터를 누비는데 웬 결혼이냐”며 유방을 따른 인물이다. 해연이 전쟁터에서 죽자 유방은 통곡했고 한나라 건국 후 유방은 해연의 노모에게 작위를 내렸다.

유방은 거병해 이름을 조금씩 떨치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패현을 떠나면서 옹치에게 패현 관할 풍읍을 맡겼다. 즉, 자신의 본거지를 옹치에게 ‘지켜 달라’ 한 것이다. 옹치가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쓴 것이다. 유방이 한창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 전령이 왔다. 옹치가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했다는 소식이었다. 유방은 깜짝 놀라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전투에서 져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얼마나 유방이 고초를 겪었는지 이로 인해 화병이 생겼다고 한다. 후에 천하가 유방과 항우의 대결로 정리되자 옹치는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은 받아 주었고 옹치는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물론 유방은 옹치를 마음으로 용서하지는 않았다. 기회를 봐 그를 처벌하려 했지만 옹치가 세운 공이 컸고 옹치가 행동거지를 조심해 유방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다. 그런 옹치에게 제후 작위를 주었으니 다른 장수와 관리들이 유방의 숙청이 없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장량의 꾀일 가능성이 크다. 장량은 공신 문제로 고민에 빠진 유방에게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그 해결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포용의 진정한 힘을 보여 줘 건국 후 분란에 빠질 수 있었던 상황을 일거에 정리할 수 있었다.

이처럼 포용과 관대함은 분열된 조직을 하나로 모으는 열쇠다.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실수가 있으면 벌을 주는 엄격함도 조직을 이끌어 가는 방법 중 하나지만, 이런 행동은 결과만으로 조직원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공을 세우기 위해 무분별하고 때로는 무모하게 도전하는 조직원이 생기거나 혹은 실수와 천벌이 무서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조직을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상을 줄 때도 받는 사람의 기대 이상을 줘야 감동하듯, 조직원을 포용해 안을 때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그 가치가 진정 발휘된다.

이런 예는 비단 유방에 국한하지 않는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 역시 결단력과 포용의 배포를 보인 군주이다. 당나라를 창업한 이연은 태자로 장남 이건성을 임명했지만 차남 이세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당나라가 창업에 성공한 공의 절대 지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야심가였다. 권력은 부자간도 나누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형제간에 우애를 따져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자 이건성에게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 바로 위징이다. 위징은 태자 이건성에게 건의했다. 그는 이세민을 두고는 태자가 황제가 될 수 없고, 설사 황제 자리에 올라도 만만치 않은 견제 세력이 될 테니 차라리 이세민을 제거하자고 수차례 건의했다. 독살도 암살도 계획했지만 우유부단했던 이건성은 고민만 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달랐다. 그의 불타는 권력욕은 과감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였다.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다. 궁궐로 태자 이건성을 불러들여 그를 암살했다. 고조 이연은 골육상쟁의 정사에 흥미를 잃고 현무문의 변 사흘 만에 이세민을 태자로 임명하고 두 달 뒤 황제의 자리도 이세민에게 내주었다. 그가 바로 태종이다. 절대 권력자가 된 이태종은 자신을 제거하라고 위징이 이건성에게 수없이 건의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위징을 처벌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징이 끌려 나왔다. 태종은 물었다. “너는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토록 참혹한 지경에 처하게 했다. 그 죄를 아는가?” 위징은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태자 이건성이 내 말을 들었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문초를 당하고 있겠습니까?” 태종은 명군이었다. 그는 건국 공신들을 숙청하는 대신 내 사람으로 만들어 등용하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태도를 높이 사, 그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태종은 자신에게 반대했던 위징과 왕규 등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위징의 곧은 성품과 해박한 역사 인식, 조리 있는 말솜씨, 현명한 성품을 알고 그에게 간언을 하는 직책을 맡겼다. 위징 역시 당 태종의 대담함과 넓은 도량에 감탄했고 진심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태종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가신 그룹의 견제가 있었다. 연회가 열렸다. 당 태종의 처남이자 1등 공신 장손무기가 위징을 건드렸다. “두건덕과 이건성의 부하이며, 떠돌이처럼 세력을 쫓았던 위징과 술을 마시게 될 줄을 몰랐네.” 위징은 대답했다. “내가 두건덕을 모실 때 백성을 윤택하게 했다. 나는 두건덕이나 이건성 개인을 위해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일을 한 것이다.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그에 비해 군과 권력은 가벼운 것이고 마지막은 사직인 것이다.” 명분 있는 위징의 말에 태종이 “다시는 위징에 대해 언급 말라. 내가 위징을 쓰는 것은 그의 충성심과 사심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라며 그를 옹호했다.

춘추 시대 첫 패자는 제나라 환공이다. 천하는 제 환공이 죽기 전까지 안정된 시기를 보였다. 하지만 제후국 왕들은 제2의 패자가 되고 싶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강한 국력과 안정된 지배력을 갖춘 두 왕을 차기 패자로 손꼽았다. 초나라 성왕과 ‘진秦나라’ 목공이었다. 하지만 제 환공에 이어 두 번째 패자 자리는 ‘진晉나라’ 문공이 차지했다. 그는 헌공의 둘째 아들. 더구나 왕인 아버지와 왕이 된 동생의 끝없는 암살 위협에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나이는 62세였다. 무엇 하나 왕이 될 조건이 아니었던 그가 왕이 되고 짧은 재위 9년에 춘추 패자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 문공의 남다른 리더십 때문이었다. 그는 ‘적을 포용하는 따뜻하고 대범한 왕’이었다.

이윽고 문공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여생과 극예는 몇 번에 걸쳐 문공을 암살하려 한 발제에게 다시 문공을 암살하자고 제안했다. 발제는 이를 승낙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몇 번이나 문공을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하늘이 문공을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발제는 문공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문공은 발제의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그를 죽이라 하자 문 앞에 있던 발제가 소리쳤다. “주공은 어찌 이리 옹졸합니까? 주공을 죽이라고 군대를 내준 헌공은 아버지이고, 또 주공을 암살하라 명령을 내린 혜공도 동생입니다. 아비가 아들을, 동생이 형을 죽이라 한 것을 꾸짖지 않고 어찌 저를 죽이라 하십니까?” 문공은 자신의 속 좁음을 깨닫고 발제를 용서했다. 발제는 여생과 극예의 음모를 알려 문공의 목숨을 살렸다.

진 문공은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군대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문공을 장수들이 만류했다. “먼저 주공과 비슷한 사람에게 주공을 옷을 입고 성 안으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임무였다. 주저하는 장수들 사이에서 발제가 자원했다. 발제는 왕의 옷을 입고 군사와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성문이 닫히고 화살이 쏟아졌다. 발제를 비롯한 300명의 병사가 모두 죽었다. 문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발제가 자신을 살렸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있다. 두수는 문공이 망명할 때 재물을 갖고 도망갔다. 해서 문공은 구걸을 해야 했다. 그 두수가 용서를 청하자 문공은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발제에 이어 두수까지 받아들이자 문공의 넓은 아량을 칭찬하면서도 속이 무르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문공은 한 수 위의 인물이었다. 그는 발제는 물론 두수까지 용서하면서 관리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문공은 망명 생활을 했고 암살 위협에 떨어야 했다. 당시 헌공과 혜공 치하에 있던 관리들은 문공이 즉위하면 숙청이 있을 것이라 불안해했다. 그런데 문공이 암살자도, 재산을 가지고 도망간 자도 용서하는 것을 보면서 관료 조직은 안정되었다. 문공의 배포가 진나라를 안정시킨 역할을 한 것이다.

▶공정과 공평은 조직을 건강하게 만든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제갈공명이 아끼던 부하 마속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는 일화에서 생긴 말이다. 제 아무리 애정이 있어도 죄가 있으면 그 죄를 물어야 하고, 그래야 조직의 기강이 바로 선다는 뜻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 실수가 조직의 근간을 해치는 것이라면 실수한 자가 누구라도 공정하고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마속은 마씨 5형제의 막내. 마씨 5형제는 촉에 큰 공을 세운 집안이다. 더구나 큰형인 마량은 제갈공명의 친한 친구. 촉과 위가 중원의 주인이 되기 위해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촉의 대장은 제갈공명이었고 위의 대장은 사마의였다. 제갈공명은 위의 군대를 위기로 몰아넣기 위한 계략을 세운다. 바로 군량미 보관이다. 병사가 많고 용감해도 먹지 못하면 다 부질없는 짓. 그만큼 전쟁에서 군량미 관리는 중요한 임무였다. 제갈공명은 요충지를 집어냈다. 바로 기산이다. 이곳은 삼면이 절벽에 둘러싸여 있고 외길뿐인 천혜의 요새. 제갈공명은 아끼는 마속에게 기산을 점령하고 군량미 관리를 맡긴다. 그리고 마속에게 신신당부한다. “절대 산 위에 진을 치지 말고 길을 막고 진을 치거라.” 마속은 기산에 도착해 산 위에 진을 친다. 부하들이 반대했지만 마속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마속은 산 위에서 상대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고집했다.

위나라 장합이 도착한다. 그는 바로 산을 에워쌌다. 산 위에는 물이 없어 시간이 지나면 마속의 군대는 자멸한다는 전략이었다. 제갈공명은 마속이 산 위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군을 보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촉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마속은 목숨만 건져 탈출했다. 마속은 제갈공명 앞에 무릎을 끓었다. 제갈공명은 그를 참수하라 명한다. 참모들이 제갈공명에게 목숨만은 살려 달라 간청했지만 제갈공명은 눈물을 흘리며 형을 집행했다. 제갈공명은 눈물을 흘렸고 가장 친한 벗의 동생을, 아끼던 부하를 죽인 자책에 북벌을 접고 촉으로 돌아갔다. 마속의 경솔한 행동 하나가 그의 목숨은 물론 제갈공명의 원대한 전략과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비단 제갈공명과 마속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더는 공정이라는 잣대에서 흔들리면 안 된다. 측근이라고, 공이 있다고 죄와 실수를 감싸면 후에 리더의 명령과 권위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후한 광무제의 이야기다. 광무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대사도 구양흡으로, 인품도 훌륭했고 광무제가 신봉하는 유교에 정통한 학자였다. 그가 뇌물죄로 투옥되었다. 관리들이 조사를 실시했다. 결과적으로, 구양흡이 뇌물을 먼저 요구하지도 않았고 아랫사람이 적은 금액을 억지로 던져놓고 가다시피 준 것으로 드러났다. 사람들은 죄도 가볍고 무엇보다 광무제가 신임하는 구양흡이라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광무제는 구양흡을 풀어주지 않았다. 구양흡의 제자들이 급히 구명 운동에 나섰다. 그러자 광무제는 “앞으로 구양흡을 내 앞에서 논의하지 말라. 구양흡에 대한 사면은 없다”라는 엄명을 내렸다. 구양흡은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구양흡은 억울하게 죽었다. ‘인사차 왔다’고 하고는 몰래 사과 한 상자 놓고 간 것이 목숨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광무제도 고민하고 수없이 갈등했다. 하지만 엄격한 법 적용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고, 더구나 총신 구양흡의 죄를 더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고 광무제는 판단하고 누구보다 더 엄격하게 다스린 것이다. 후에 광무제 치하에서는 그 누구도 법과 원칙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12호 (22.01.1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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